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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 00029208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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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00029208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책 소개
혐오는 어디에서 자라서 어디를 향해 흘러가나?
웅크리고 있던 혐오가 기지개를 켜다 한번 고개를 들면, 개인과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를 황폐화시키고 환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만다. 20세기 전체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극단적 인종주의의 예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아래 자유민주주의가 지배적 정치이데올로기가 된 오늘날의 현대 사회 역시 나라와 지역은 달라도 혐오는 인간을 배제하고 지배하는 정치적 수단이며 인간의 삶을 무력화시키거나 황폐화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권위주의적 군사독재의 지배가 종식되고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가능해지면서 동시에 개인과 집단 사이에 혐오가 자라나고 마침내는 표현의 자유가 혐오의 자유와 구분되지 않을 지경이 된 현실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혐오의 유혹은 강하고 또 은밀하다. 상대와의 긴 토론의 과정을 견딜 필요도 없이 상대를 꼼작 못하게 하거나 무력화시키는 길이 있음을 아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혐오의 자유로 교환한다. 한번 시작된 혐오를 멈추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혐오의 심각성을 실감하고 거기서 빠져나오려 하지만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쉬운 길은 법적 제재에 호소하는 길이다. 그러나 혐오에 칼을 대고 둑을 쌓으려 하는 순간, 인간의 가능성인 자유를 질식시키는 결과를 낳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혐오를 발하는 입에 재갈을 물리려면 우리 자신의 자유를 일정하게 포기하거나 유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 우리는 거기서 전체주의를 예감하며 흠칫 뒤로 물러선다. 다시 말해 혐오를 법적으로 규제하려는 순간, 정작 세련되고 복잡해진 모습을 한 혐오는 건드리지도 못한 채 자유만 위축시키는 결과가 되는 모순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당장은 화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질문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포기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혐오를 방치하거나, 혐오를 물리친다는 목적으로 상대의 입에 재갈을 물리거나, 그도 아니면 혐오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혐오의 자유를 택하는 대신, 우리의 자유를 더 고양시켜 혐오 표현의 해악에 맞서는 방안은 없을까? 상대를 제압하거나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우리의 자유를 확대해 가는 방안 말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되찾고자 했던, 지키려 했던, 자유의 올바른 길이 아닐까? 『말대꾸―표현의 자유 대 혐오 표현』은 바로 이 자유의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책이다. 혐오 중독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공론장의 가능성을 완전히 압도하기 전에 그 가능성을 우리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와 혐오 표현, 둘은 영영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한국 사회를 몇 년째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제 중 하나는 단연 혐오의 문제이다. 멀리는 세월호 유가족 모욕에서부터 5·18 역사 왜곡,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를 둘러싼 길고 거친 논쟁을 거치면서 그래서 우리는 혐오 표현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방도를 모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작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유는 역시 표현의 자유와 혐오 표현의 해악을 극복하는 문제가 지니고 있는 딜레마를 풀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혐오 표현을 처벌하자는 주장에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검열과 독재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이 따르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거나 혐오의 자연적인 퇴거를 주장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나 폭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현실이 반증으로 제시되면서 비판에 직면한다. 그러는 사이 이제는 특정 사안을 넘어 한국 사회의 모든 사안이 혐오 대 혐오의 대치로 환원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호주의 정치학자 캐서린 겔버의 『말대꾸: 표현의 자유 대 혐오 표현』은 바로 이러한 딜레마와 이분법에 도전하는 책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서구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혐오 표현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딜레마였다. 1970년대 후반까지도(어쩌면 지금도) 이른바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라 불리는 백인 우선주의 정책이 시행되었던 호주의 현실이 이 책을 낳게 한 배경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인종 혐오와 여성 혐오가 교차하는 미국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적 시장 질서로의 통합이 가쁘게 진행되는 현실에서 이제 이러한 딜레마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저자인 캐서린 겔버가 자신의 경험적 연구가 호주와 영국,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던졌던 질문을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차원의 질문으로 다시 던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혐오 표현의 대두, 평행선을 달리는 팽팽한 두 문제를 결합시켜 동시에 해결해 가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표현의 자유’만을 극단적으로 옹호하거나, 아니면 과도한 ‘혐오 표현 규제’에만 신경 쓰면서, 이 둘을 대립시키다가 둘 다 해결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해 온 지금까지와 달리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도 긍정하면서, 혐오 표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더구나 대립되는 관점을 이론의 영역 안에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다시 말해 정책적으로 조화시킴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혐오가 뿌리내리고 있는 불평등한 세계를 연장하는 것이 아닌 평등을 지지하는 그런 길은 없는 것일까?
“안됐네요. 그래도 당신은 살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긍정하면서도, 혐오표현의 해악과 맞서 싸우는 혁신적 방법, ‘말대꾸 정책’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에 있어서 표현의 자유가 핵심이라고 주장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해로운 표현이라 하더라도 관용해야 한다고 타이른다. 이를테면 조나단 라우흐Jonathan Rauch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약은 학문의 자유에 적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모욕의 피해자에게는 “안됐네요. 그래도 당신은 살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표현의 자유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표현의 자유 개념에 의지하고 있거나,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제정된 실제 규제법에서도 많은 혐오 표현들을 빠져나가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문제점들을 노출시킨다. 책의 저자 겔버는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인종모욕법(NSW 법)에 대해 수행한 실제 10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원래는 이 법이 혐오 표현의 해악을 막고 표현의 자유도 보장하기 위한 좋은 의도에서 입법되었지만, 사실상 혐오 표현 규제에 실패했음을 보여 준다. 그녀가 분석한 호주의 NSW 법의 사례는 한국에서도 혐오 표현 금지법이 실행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반면교사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할 것이다. 겔버에 따르면 이러한 지배적인 표현의 자유 옹호론들(진리 논증, 자기 발전 논증, 권리 논증, 민주주의 논증)은 모두 ‘소극적 자유’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즉 자유를 방해하는 제약의 부재를 뜻하는 자유 개념으로, ‘무엇을 행할 자유, 무엇이 될 자유’, 즉 자기 결정과 자기 지배로서의 자유를 뜻하는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와 대비된다. 소극적 자유 개념에 의지한 주류 표현의 자유 옹호론들은 표현의 극대화 그 자체만을 강조함으로써, 모욕적이거나 해악을 끼치는 표현들에 대해서는 방관하거나 대안 제시에 실패하여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약자들의 불평등을 가중시킨다는 문제점들이 있는 것이다.
한편 저자가 보기에 혐오 표현 규제라는 토끼만을 쫓는 것에도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혐오 표현은 차별과 불평등을 지속시키고, 피해자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응당 해결되어야 할 심각한 부정의지만, 그 해결책이 꼭 처벌적이거나 규제적인 제제가 강제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더군다나 혐오 표현 규제법의 목적인 혐오 표현의 해악의 감소가 정말로 법을 통해 해소되는가라는 의구심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혐오 발화자를 구금하는 방식의 형사 규제 접근법의 경우엔, 최소한 수감 기간 동안은 혐오 발화자가 더 넓은 공동체에서 차별을 실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피해자에 대한 혐오 표현의 해악을 시정해 주지는 못한다. 또한 처벌 지향적인 접근은 피해자들이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에, 혐오 표현 피해자들이 그들이 겪은 차별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직접적으로 능력을 강화하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런저런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제시된 혐오 표현 규제책들 역시 비판한다. 그것이 혐오 표현을 ‘낮은 차원’과 ‘높은 차원’으로 구분하는 것이든, 민사상의 손해배상 소송이든 규제를 기본으로 한 문제는 마찬가지로 남는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혐오 발언의 수신자가 혐오 발화자의 언어를 ‘재수행restaging’하고 ‘재의미 부여resignifying’함으로써 혐오 표현의 해로운 효과들에 대항하자고 권고하는 버틀러 역시 비판받는다. 버틀러의 제안은 혐오 표현에 대해 규제나 처벌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제안들에 비해 뛰어나기는 하지만, 가해자의 언어가 전유되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혐오 표현이 사회적 약자들을 침묵시킴으로써, 이들이 표현의 자유에 참여하고 이를 행사할 수 있는 역량을 저해한다면, 혐오 표현의 피해자들이 되받아쳐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적, 물질적, 제도적 지원하는 ‘말대꾸speaking back 정책’이 바로 저자가 제안하는 대안적 대응 전략이다. 그녀는 책의 2장 ‘표현의 자유 확장하기’에서 자유를 방해의 배제로 바라보는 소극적 자유 입장과 달리, 적극적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이는 자유를 단순히 ‘기회’가 아닌 ‘행사’로 간주하여, 자유가 행사될 수 있는 조건들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표현의 자유는 법이나 정책이 실제 표현에 대한 참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조건들의 제공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단순히 국가를 자유의 적으로 바라보거나 표현을 금지하거나 검열하지 않는 수동적인 역할로 보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능동적으로 조성해 주는 적극적인 역할 수행자로 보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혐오 표현 규제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주장에 놓인 핵심 키워드는 ‘역량’이다. 이는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 이론에 토대한 것으로, 사람들이 실제로 원하는 무언가를 행할 수 있고 원하는 누군가가 될 수 있는 실제 기회를 뜻하는 이러한 인간 역량들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표현은 인간 역량들의 실현에 핵심적인 것으로, 즉 다양한 방식으로 훌륭한 인간적인 삶에 기여하거나 손상시킬 수 있으며, 사상, 지식, 의견을 의사소통할 수 있는 도구로서 표현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 발전에 핵심적인 활동이다. 말대꾸 정책은 이러한 표현의 자유를 극대화함과 동시에 혐오 표현이 가져오는 해악에 규제가 아닌 대응 발언으로 맞서게 한다. 이러한 대항 표현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녀는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의사소통행위 이론’에서 ‘타당성 주장’을 분석하는 방법론을 가져온다. 그것은 혐오 표현 행위의 의미, 힘, 효과에 (말하기에 참여함으로써)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타당성 주장들을 제기함을 통해) 논박하는 것을 추구한다. ‘말대꾸’ 정책이란 한마디로 “제도화된 논변”이며 이 과정에서 혐오 표현의 피해자들은 대항 타당성 주장들을 제기함으로써, 혐오 발화자가 제기한 타당성 주장에 직접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스러운 사회’와 ‘혐오를 금지하는 사회’를 넘어서
저자가 제시하는 역량 논증과 말대꾸 정책은, 표현의 자유를 규제했을 경우 발생할 부작용들을 최소화하면서도 혐오 표현의 문제와 확산을 제지한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토끼도 잡고, 혐오 표현의 예방 및 대응이라는 다른 토끼도 잡는 혁신적인 해법이다. 정치학자 코리 브렛슈나이더Corey Brettschneide 역시 비슷한 분석과 제안을 한 바 있는데, 그는 국가가 시민의 표현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극단적인 사회를 ‘혐오를 금지하는 사회Hatebanning Society’라 일컫는 한편 혐오 표현이 창궐하고 번성하여 사회적 약자들에게 막대한 해악을 끼치는 사회를 ‘혐오스러운 사회Hateful Society’라고 지칭한다. 이런 두 극단의 사회는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반면 국가가 혐오 표현에 방관하지 않고 해악을 막기 위해 개입하기는 하지만,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사회를 브렛슈나이더는 ‘혐오를 허용하는 사회Hate-allowing Society’라고 설명한다. ‘혐오를 허용하는 사회’는 ‘혐오를 금지하는 사회’나 ‘혐오스러운 사회’와 달리, 혐오 표현을 허용하면서도 이를 내버려두지 않고서 대항 표현을 통해 억제하는 사회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곳은 혐오 표현이 넘쳐 나는 데 국가와 사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는 ‘혐오스러운 사회’도, 또한 표현의 자유를 강제로 억누르는 ‘혐오를 금지하는 사회’도 아닌, 표현의 자유를 긍정하면서도 말대꾸, 즉 대항 표현을 가지고 혐오 표현과 맞서 싸우는 ‘혐오를 허용하는 사회’인 것이다.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가, 더 늦기 전에 혐오 중독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웅크리고 있던 혐오가 기지개를 켜다 한번 고개를 들면, 개인과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를 황폐화시키고 환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만다. 20세기 전체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와 같은 극단적 인종주의의 예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아래 자유민주주의가 지배적 정치이데올로기가 된 오늘날의 현대 사회 역시 나라와 지역은 달라도 혐오는 인간을 배제하고 지배하는 정치적 수단이며 인간의 삶을 무력화시키거나 황폐화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권위주의적 군사독재의 지배가 종식되고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가능해지면서 동시에 개인과 집단 사이에 혐오가 자라나고 마침내는 표현의 자유가 혐오의 자유와 구분되지 않을 지경이 된 현실을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혐오의 유혹은 강하고 또 은밀하다. 상대와의 긴 토론의 과정을 견딜 필요도 없이 상대를 꼼작 못하게 하거나 무력화시키는 길이 있음을 아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혐오의 자유로 교환한다. 한번 시작된 혐오를 멈추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혐오의 심각성을 실감하고 거기서 빠져나오려 하지만 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쉬운 길은 법적 제재에 호소하는 길이다. 그러나 혐오에 칼을 대고 둑을 쌓으려 하는 순간, 인간의 가능성인 자유를 질식시키는 결과를 낳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혐오를 발하는 입에 재갈을 물리려면 우리 자신의 자유를 일정하게 포기하거나 유예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순, 우리는 거기서 전체주의를 예감하며 흠칫 뒤로 물러선다. 다시 말해 혐오를 법적으로 규제하려는 순간, 정작 세련되고 복잡해진 모습을 한 혐오는 건드리지도 못한 채 자유만 위축시키는 결과가 되는 모순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당장은 화해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질문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포기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혐오를 방치하거나, 혐오를 물리친다는 목적으로 상대의 입에 재갈을 물리거나, 그도 아니면 혐오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스스로 혐오의 자유를 택하는 대신, 우리의 자유를 더 고양시켜 혐오 표현의 해악에 맞서는 방안은 없을까? 상대를 제압하거나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우리의 자유를 확대해 가는 방안 말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되찾고자 했던, 지키려 했던, 자유의 올바른 길이 아닐까? 『말대꾸―표현의 자유 대 혐오 표현』은 바로 이 자유의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책이다. 혐오 중독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공론장의 가능성을 완전히 압도하기 전에 그 가능성을 우리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와 혐오 표현, 둘은 영영 화해할 수 없는 것일까?
한국 사회를 몇 년째 뜨겁게 달구고 있는 주제 중 하나는 단연 혐오의 문제이다. 멀리는 세월호 유가족 모욕에서부터 5·18 역사 왜곡,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를 둘러싼 길고 거친 논쟁을 거치면서 그래서 우리는 혐오 표현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방도를 모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작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유는 역시 표현의 자유와 혐오 표현의 해악을 극복하는 문제가 지니고 있는 딜레마를 풀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혐오 표현을 처벌하자는 주장에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검열과 독재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이 따르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거나 혐오의 자연적인 퇴거를 주장하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이나 폭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현실이 반증으로 제시되면서 비판에 직면한다. 그러는 사이 이제는 특정 사안을 넘어 한국 사회의 모든 사안이 혐오 대 혐오의 대치로 환원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호주의 정치학자 캐서린 겔버의 『말대꾸: 표현의 자유 대 혐오 표현』은 바로 이러한 딜레마와 이분법에 도전하는 책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서구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혐오 표현의 문제는 풀기 어려운 딜레마였다. 1970년대 후반까지도(어쩌면 지금도) 이른바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라 불리는 백인 우선주의 정책이 시행되었던 호주의 현실이 이 책을 낳게 한 배경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인종 혐오와 여성 혐오가 교차하는 미국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적 시장 질서로의 통합이 가쁘게 진행되는 현실에서 이제 이러한 딜레마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저자인 캐서린 겔버가 자신의 경험적 연구가 호주와 영국,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던졌던 질문을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차원의 질문으로 다시 던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혐오 표현의 대두, 평행선을 달리는 팽팽한 두 문제를 결합시켜 동시에 해결해 가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표현의 자유’만을 극단적으로 옹호하거나, 아니면 과도한 ‘혐오 표현 규제’에만 신경 쓰면서, 이 둘을 대립시키다가 둘 다 해결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해 온 지금까지와 달리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도 긍정하면서, 혐오 표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더구나 대립되는 관점을 이론의 영역 안에서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다시 말해 정책적으로 조화시킴으로써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혐오가 뿌리내리고 있는 불평등한 세계를 연장하는 것이 아닌 평등을 지지하는 그런 길은 없는 것일까?
“안됐네요. 그래도 당신은 살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의 중요성을 긍정하면서도, 혐오표현의 해악과 맞서 싸우는 혁신적 방법, ‘말대꾸 정책’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에 있어서 표현의 자유가 핵심이라고 주장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해로운 표현이라 하더라도 관용해야 한다고 타이른다. 이를테면 조나단 라우흐Jonathan Rauch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약은 학문의 자유에 적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모욕의 피해자에게는 “안됐네요. 그래도 당신은 살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해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표현의 자유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표현의 자유 개념에 의지하고 있거나, 이런 관점에 입각하여 제정된 실제 규제법에서도 많은 혐오 표현들을 빠져나가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문제점들을 노출시킨다. 책의 저자 겔버는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스 주의 인종모욕법(NSW 법)에 대해 수행한 실제 10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원래는 이 법이 혐오 표현의 해악을 막고 표현의 자유도 보장하기 위한 좋은 의도에서 입법되었지만, 사실상 혐오 표현 규제에 실패했음을 보여 준다. 그녀가 분석한 호주의 NSW 법의 사례는 한국에서도 혐오 표현 금지법이 실행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반면교사로 보여 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할 것이다. 겔버에 따르면 이러한 지배적인 표현의 자유 옹호론들(진리 논증, 자기 발전 논증, 권리 논증, 민주주의 논증)은 모두 ‘소극적 자유’ 개념에 의지하고 있다. 소극적 자유Negative Liberty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즉 자유를 방해하는 제약의 부재를 뜻하는 자유 개념으로, ‘무엇을 행할 자유, 무엇이 될 자유’, 즉 자기 결정과 자기 지배로서의 자유를 뜻하는 적극적 자유Positive Liberty와 대비된다. 소극적 자유 개념에 의지한 주류 표현의 자유 옹호론들은 표현의 극대화 그 자체만을 강조함으로써, 모욕적이거나 해악을 끼치는 표현들에 대해서는 방관하거나 대안 제시에 실패하여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약자들의 불평등을 가중시킨다는 문제점들이 있는 것이다.
한편 저자가 보기에 혐오 표현 규제라는 토끼만을 쫓는 것에도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혐오 표현은 차별과 불평등을 지속시키고, 피해자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응당 해결되어야 할 심각한 부정의지만, 그 해결책이 꼭 처벌적이거나 규제적인 제제가 강제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다. 더군다나 혐오 표현 규제법의 목적인 혐오 표현의 해악의 감소가 정말로 법을 통해 해소되는가라는 의구심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혐오 발화자를 구금하는 방식의 형사 규제 접근법의 경우엔, 최소한 수감 기간 동안은 혐오 발화자가 더 넓은 공동체에서 차별을 실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피해자에 대한 혐오 표현의 해악을 시정해 주지는 못한다. 또한 처벌 지향적인 접근은 피해자들이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에, 혐오 표현 피해자들이 그들이 겪은 차별에 이의를 제기하도록 직접적으로 능력을 강화하지 않는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런저런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제시된 혐오 표현 규제책들 역시 비판한다. 그것이 혐오 표현을 ‘낮은 차원’과 ‘높은 차원’으로 구분하는 것이든, 민사상의 손해배상 소송이든 규제를 기본으로 한 문제는 마찬가지로 남는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혐오 발언의 수신자가 혐오 발화자의 언어를 ‘재수행restaging’하고 ‘재의미 부여resignifying’함으로써 혐오 표현의 해로운 효과들에 대항하자고 권고하는 버틀러 역시 비판받는다. 버틀러의 제안은 혐오 표현에 대해 규제나 처벌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제안들에 비해 뛰어나기는 하지만, 가해자의 언어가 전유되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측면에서 제한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혐오 표현이 사회적 약자들을 침묵시킴으로써, 이들이 표현의 자유에 참여하고 이를 행사할 수 있는 역량을 저해한다면, 혐오 표현의 피해자들이 되받아쳐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적, 물질적, 제도적 지원하는 ‘말대꾸speaking back 정책’이 바로 저자가 제안하는 대안적 대응 전략이다. 그녀는 책의 2장 ‘표현의 자유 확장하기’에서 자유를 방해의 배제로 바라보는 소극적 자유 입장과 달리, 적극적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이는 자유를 단순히 ‘기회’가 아닌 ‘행사’로 간주하여, 자유가 행사될 수 있는 조건들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표현의 자유는 법이나 정책이 실제 표현에 대한 참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조건들의 제공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단순히 국가를 자유의 적으로 바라보거나 표현을 금지하거나 검열하지 않는 수동적인 역할로 보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능동적으로 조성해 주는 적극적인 역할 수행자로 보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혐오 표현 규제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주장에 놓인 핵심 키워드는 ‘역량’이다. 이는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 이론에 토대한 것으로, 사람들이 실제로 원하는 무언가를 행할 수 있고 원하는 누군가가 될 수 있는 실제 기회를 뜻하는 이러한 인간 역량들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표현은 인간 역량들의 실현에 핵심적인 것으로, 즉 다양한 방식으로 훌륭한 인간적인 삶에 기여하거나 손상시킬 수 있으며, 사상, 지식, 의견을 의사소통할 수 있는 도구로서 표현에 참여하는 것은, 인간 발전에 핵심적인 활동이다. 말대꾸 정책은 이러한 표현의 자유를 극대화함과 동시에 혐오 표현이 가져오는 해악에 규제가 아닌 대응 발언으로 맞서게 한다. 이러한 대항 표현의 메커니즘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녀는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의 ‘의사소통행위 이론’에서 ‘타당성 주장’을 분석하는 방법론을 가져온다. 그것은 혐오 표현 행위의 의미, 힘, 효과에 (말하기에 참여함으로써)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타당성 주장들을 제기함을 통해) 논박하는 것을 추구한다. ‘말대꾸’ 정책이란 한마디로 “제도화된 논변”이며 이 과정에서 혐오 표현의 피해자들은 대항 타당성 주장들을 제기함으로써, 혐오 발화자가 제기한 타당성 주장에 직접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스러운 사회’와 ‘혐오를 금지하는 사회’를 넘어서
저자가 제시하는 역량 논증과 말대꾸 정책은, 표현의 자유를 규제했을 경우 발생할 부작용들을 최소화하면서도 혐오 표현의 문제와 확산을 제지한다는 점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토끼도 잡고, 혐오 표현의 예방 및 대응이라는 다른 토끼도 잡는 혁신적인 해법이다. 정치학자 코리 브렛슈나이더Corey Brettschneide 역시 비슷한 분석과 제안을 한 바 있는데, 그는 국가가 시민의 표현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극단적인 사회를 ‘혐오를 금지하는 사회Hatebanning Society’라 일컫는 한편 혐오 표현이 창궐하고 번성하여 사회적 약자들에게 막대한 해악을 끼치는 사회를 ‘혐오스러운 사회Hateful Society’라고 지칭한다. 이런 두 극단의 사회는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반면 국가가 혐오 표현에 방관하지 않고 해악을 막기 위해 개입하기는 하지만,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사회를 브렛슈나이더는 ‘혐오를 허용하는 사회Hate-allowing Society’라고 설명한다. ‘혐오를 허용하는 사회’는 ‘혐오를 금지하는 사회’나 ‘혐오스러운 사회’와 달리, 혐오 표현을 허용하면서도 이를 내버려두지 않고서 대항 표현을 통해 억제하는 사회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곳은 혐오 표현이 넘쳐 나는 데 국가와 사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는 ‘혐오스러운 사회’도, 또한 표현의 자유를 강제로 억누르는 ‘혐오를 금지하는 사회’도 아닌, 표현의 자유를 긍정하면서도 말대꾸, 즉 대항 표현을 가지고 혐오 표현과 맞서 싸우는 ‘혐오를 허용하는 사회’인 것이다.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가, 더 늦기 전에 혐오 중독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목차
감사의 글
축약어
개요
서론
CHAPTER 1
문제: 인종모욕금지법의 실제 사례, 1989-1998
입법 과정
1989-1998: 문제들
결론
CHAPTER 2
표현의 자유 확장하기: 역량 접근법
주요 표현의 자유 옹호 논증들의 결점
어떤 종류의 자유인가?
표현 정책에 대한 역량 접근법
CHAPTER 3
표현은 행위이다
표현-행위 이분법
수행문과 진술문
수행문-진술문 구분의 정책 적용
표현의 발화 수반적 가능성들
하버마스의 타당성 주장을 표현행위 분석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예비 관찰
하버마스의 타당성 주장
대응의 필요성
CHAPTER 4
혐오 표현은 해로운 행위다: 혐오 표현 행위의 현상학
직접적인 사례
좀 더 세련되고 난해한 사례
“가치가 없는 고발”
혐오 표현 행위의 발화 효과적 영향들
새로운 혐오 표현 정책
CHAPTER 5
호주, 영국, 미국 비교
연구된 국가들의 유사점
연구된 국가들의 차이점
CHAPTER 6
‘말대꾸’ 정책
‘말대꾸’ 정책 시행하기
있을 수 있는 반대들
기타 혐오 표현 정책 제안들
잠재적 적용들―“곤란한 사례들”
결론
주석
참고문헌
부록 A
부록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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