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시험인간: 불신과 불공정, 불평등이 낳은 슬픈 자화상
- 발행사항
- 서울: 생각정원, 2020
- 형태사항
- 314 p., 22cm
- 서지주기
- 참고문헌을 포함하고 있음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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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가능 (2) |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 00029221 | 대출가능 | - |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 00029222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2)
- 등록번호
- 00029221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 등록번호
- 00029222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책 소개
당신은 몇 등급의 인간입니까?
사회학자×심리학자, 시험중독에 빠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진단하다!
1. 당신은 몇 등급의 인간입니까?
- 사회학자와 심리학자, 시험중독에 빠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진단하다!
# 5살 아인이는 매주 원어민 선생님과 영어 과외를 하고 있다. 친구들과 놀고 싶지만, 영어유치원에 가면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꾹 참고 있다.
# 10살 새롬이는 모 대학 부설 수학영재교육원에 입학하기 위해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원으로 간다. 벌써 6학년 과정에 들어갔지만, 최소 중3까지는 미리 해두어야 합격할 수 있다는 말에 잠을 줄이고 있다.
# 14살 수연이는 자유학기제 동안 진로와 미래를 탐색하는 대신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목고와 자사고가 폐지되도 엘리트 고등학교는 남을 거라고 부모님이 이야기해주셨기 때문이다.
# 유명한 외고에 다니는 진욱이는 끝이 없는 수행평가 지옥과 내신 준비, 그리고 수능 최저기준에 맞추기 위해 수면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한다.
# 은유 씨는 대학에 입학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지만 토익을 비롯해 수능과 비슷한 대기업 인적성검사를 준비하며 20대 초중반을 보내고 있다.
# 명수 씨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20대 중후반은 물론 30대까지 시험에 매달린다. 명수 씨의 큰 형은 승진시험 때문에 퇴근 후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명수 씨의 아버지는 은퇴 이후에도 직업을 얻기 위해 다양한 자격증시험을 공부하고 있다. 일하기 위해서 자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유아부터 은퇴를 앞둔 노년기까지, 한국 사회는 시험에서 합격해야만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경쟁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시험중독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온 사회 구성원들이 시험에 매달린다. 각 시험에 따라 매뉴얼과 공략법이 있고, 그대로 따르면 삶이 정해진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는 이미 시험공화국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험을 통해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를 가르는 사회 속에서 모든 개인은 낮은 자존감, 자기효능감, 자기주도성의 상실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객관식 지필시험이 인간을 평가하는 도구가 되면서 사회가 획일화된다는 단점도 잘 알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경쟁 체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현상을 유지시키는 핵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며, 청년 및 청소년 연구를 진행 중인 사회학자 김기헌 박사와 심리학자인 장근영 박사는 이 현상의 핵심에 ‘시험’이 자리하고 있으며, ‘시험’이 모든 사회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시험인간》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가 만나 시험을 곧 공정함이라 믿는 한국 사회만의 특징과 시험을 대하는 한국인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 최초의 책이다.
2. 왜 한국에서 시험이 문제인가?
- 시험공화국 속 시험인간의 탄생
한국의 시험은 단순히 자기 능력을 측정하고 학습의 방향을 정하는 ‘수단’이 아니다. 영유아기부터 영어유치원 선발을 위해 시험을 준비하고, 초등학생이 되면 영재원에 합격하기 위해 사교육을 시작한다. 특목고 진학을 위해 중학교부터 성적을 관리하고, 고등학생이 되면 내신 등급을 올리기 위해 시험지 유출마저 일어나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이곳에서 시험은 인생의 길목마다 자리해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개인에게 큰 위험부담을 전가하는 ‘고부담 시험(high stake exam)’이다. 저자들은 한국 사회를 지배한 고부담 시험이, 선발과 경쟁에 익숙한 ‘시험인간’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선발과 경쟁을 가르는 시험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시험에 따른 사회적 보상이야말로 다툼의 여지없는 가장 공정한 방식이 아닌가! 이 책은 시험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에 따른 결과에 철저히 복종하는 시험인간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시험은 원래 ‘목표-내용-평가’라는 일련의 교육과정 속에서 교육 목표가 온전히 달성되었는지를 측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시험을 통해 교육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그리고 시험 결과를 통해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험은 개개인의 성취도와 성장가능성을 높여가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시험은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오직 합격과 선발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전체 인원 중에 10명만 선발하고, 합격 커트라인도 10명이 몇 점을 받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평가도구로 사용되는 시험은 70점을 받던 학생이 80점을 받으면 성장가능성을 인정받지만, ‘고부담 시험’문화에서는 합격 커트라인이 90점이라면 80점은 불합격자의 점수일 뿐이다. 시험 결과에 따라 개인의 삶이 달라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변한다. 합격과 선발에 모든 것을 베팅하는 사람들은 성장가능성이나 과정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오직 시험에 길들여지고, 출제자의 의도대로 자신의 사고를 조정하며, 시험이 준비한 길을 정답으로 여기는 ‘시험인간’으로 자라난다.
《시험인간》의 저자들은 이대로 시험인간들의 세상이 계속될 경우, 승자독식으로 인한 갑질과 불평등 문제, 시험만이 공정하다는 맹신 속에서 사회 제도를 비판적으로 볼 수 없다는 측면을 책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들의 결론은 오랫동안 추적해온 연구결과와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에게 더 입체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시험인간》은 우리가 그토록 숭배해온 시험의 본질을 해부하면서 시험에 집착하는 이유를 묻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다가올 시대는 정답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시험인간으로 채워진 사회는 새 시대를 만들 수 없다. 이 책은 서열화와 경쟁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한국 사회를 바라보던 저자들이 만나 던지는 질문들은 시험이라는 존재 기반을 흔들기 시작한다. 나를 증명하는 뿌리 깊은 기반이 흔들리면서 독자들은 탈시험인간의 형태와 ‘좋은 시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이 책은 시대의 한계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바깥을 상상하는 놀라운 여정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러기 위해 시험인간들이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을 먼저 살펴야 한다. 시험중독이 될 수밖에 없는 여건, 시험공화국이 굳건해질 수 있는 생각들은 일종의 신화와 같다. 저자들은 의심 없이 믿고 있는 시험인간들의 신화를 하나씩 해체한다.
3. 시험인간들이 믿는 신화 1
- 시험은 공정하다!
거의 모든 지필시험은 응시생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문제를, 동일한 시간 동안 풀게 되어 있다. 수능시험은 사용하는 필기구조차 똑같다. 따라서 이 장면만 보면 모든 수험생이 똑같은 조건에서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단 시험장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오는 수험생과 부모의 차를 타고 오는 수험생이 있지 않던가. 시험 전날까지 어떤 교육,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거기에서 어떤 공정성을 발견할 수 있나?
시험의 공정성은 신화다. 더욱 큰 문제는 그 신화에 의존할 때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당연히 여기고,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공정한 시험에 순종하지 않는 자로 외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고 절차의 공정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사실상 진짜 공정성을 추구할 기회를 포기하고, 허울뿐인 공정성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감추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라는 지적은 여러 곳에서 제기되어왔다.
저자들은 교육평론가의 이범의 글을 인용하며, 한국이 교육을 통해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절차의 공정성이 아닌 경제적 공정성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6・25전쟁 전후에 한국에서는 소작농들이 자신이 경작하던 농지를 소유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이 열렸다. 실제로 1945년 말 전체 농지의 35퍼센트에 불과하던 자작지(소유자가 경작하는 농지)의 면적이 1960년에 이르면 전체 농지의 65퍼센트로 증가한다. 1960년 당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균등하게 토지가 분배된 나라였다. 이렇게 대다수의 농부가 재산을 보유하자, 이들은 농지라는 자본을 이용해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개천에서 난 용이 된 것이다. 당시 한국과 비슷한 경제적 여건이었던 페루, 콜롬비아,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들과의 차이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 나라에서는 농부들이 아무리 자녀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고 싶어도 값비싼 대학 학비를 조달할 능력이 없었다. 교육이 정체되자 경제성장에도 한계가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론에서 지적했듯, ‘교육에서 공정성을 논의할 때만큼은 교육 여건의 불평등이나 교육 정의의 문제보다 유독 공정한 대입 경쟁 문제에만 집중하는’ 양상이 벌어진다. 수능점수는 순수한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반영한 것이고, 이 점수에 따라 보상을 달리하는 사회체계를 정당한 것이라 여기는 믿음은 그저 미신일 뿐이다. 논란이 되었던 드라마은 학생부종합전형을 둘러싼 빈부격차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수능시험 또한 부유한 학생과 가난한 학생이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경쟁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수능은 공정하다고 믿으면서 그 점수에 따라서 갈라지는 인생의 길,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도 모두 공정한 것으로 믿게 된다. 이 책은 시험인간들이 강력하게 맹신하는 시험과 공정성의 연결고리는 사회 기반에 내재한 문제를 간과하는 착시 현상일 뿐임을 다양한 자료를 통해 드러낸다.
4. 시험인간들이 믿는 신화 2
- 일등만 하면, 합격만 하면 행복이 보장된다!
합격과 불합격, 선발에서 승리하기 위해 시험인간들은 수면시간을 줄이며 공부에 매진한다. 그렇다면 시험인간들의 공부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학자들의 분석과 언론을 통해 알려진 시험인간들의 공부 방식은 ‘나’의 생각을 지우는 ‘무비판적 암기’와 ‘출제자의 의도에 충실히 따르는 답안 작성’에 있다. 이 책의 저자들 역시 또한 출제자의 의도에 맞춰 정답을 알아내기 위해 반복 학습을 진행하는 과정을 시험 훈련이라고 말한다.
시험 훈련의 문제는 비판적인 사고력을 키울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4차산업혁명 사회에서는 인간의 비판적 사고와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문제당 30초 이내에 답을 적어야 하는 수능시험에서 비판적 사고는 방해가 될 뿐이다. 시험 훈련은 수능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학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들은 서울대생을 대상으로 한 그들의 학습법을 분석한다. 공부를 열심히 오래한 학생이라고 해서 반드시 학점이 높지 않았다. 자기만의 생각보다 ‘교수가 말한 걸 그대로 따라 적는 학생’들의 성적이 매우 높았다. 게다가 수능시험과 닮은 대기업 인적성 시험에서도 시험 훈련은 유효하다.
오직 ‘시험’에 통과하기 위한 공부는 ‘나’라는 존재를 삭제함으로써 가능하다. 시험인간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이 할 일은 자신의 생각이 시험이 묻는 정답의 구조와 최대한 유사하게 닮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사춘기 시절에 다가오는 성장에 대한 질문이나 고민도 시험을 핑계로 끊임없이 유예시킨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뭘 해야 할지 자신만의 진로가 만들어지지 않아 타인의 삶을 참조하는 현상이 계속되는 것이다.
내가 삭제된 공부, 학습의 주체가 사라진 공부는 호흡이 길 수가 없다. 생각의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지식을 쌓는 것은 성취처럼 보이지만 극심한 자기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 부자연스러움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유인동기가 필요하게 되고, 그 자리에 바로 ‘합격자라는 권력’이 자리 잡는다. 이들은 시험에 통과하면 대우를 받고, 통과하지 못하면 추락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합격자라는 경험을 한번 맛보게 되면 절대 놓을 수 없다. ‘내가 공부를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시험인간》의 저자들은 중학생을 대상으로 행복도를 조사한 바 있다. 이들의 답변은 시험인간들의 심성을 정확히 드러낸다. 행복도 조사에 답변한 학생들은 남보다 성적이 좋을 때 행복하고, 남보다 성적이 떨어졌을 때 우울해진다고 답변했다. 합격과 1등이라는 시험인간의 정체성은 시험 결과에 따라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공부를 할수록 계속해서 자신을 상실하고, 타인의 기준을 삶의 나침반으로 삼는 시험인간들은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시험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데 익숙한 인간들은 또 다른 시험 앞에서 긴장하고, 합격하지 못할까 불안해한다. 합격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안과 열패감이다.
5. 시험인간들의 신화 3
- 미리 준비하는 자가 최후에 웃는 자가 된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은 한 개인이 참여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통하여 이용할 수 있는 자본을 말한다. 사회적 자본은 결국 사람이다. 서로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고, 고민을 터놓고 상담할 수 있는 친구. 어떤 일을 함께할 수 있는 듬직한 동료.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줄 거라 믿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 이런 사회적 자본이 있어야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풍요롭지만 불안한 이유는 사회적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자본은 타인에 대한 신뢰다. 그런데 신뢰는 도움을 주고받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고부담 시험은 협력보다는 경쟁과 배신을 유도한다. 고부담 시험이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기 때문이다.
《시험인간》의 저자들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어떤 전략이 최선인지 시뮬레이션한 내용을 한국의 선행학습(사교육) 시장과 연결시킨다. 게임의 조건인 협력과 배신 중 최선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단 하나였다. 그건 ‘이 게임을 단 한 번만 하고 끝내느냐’ 아니면 ‘같은 상대와 여러 번 게임을 하느냐’였다. 상대방과 한 번씩만 하는 조건일 때, 최선의 전략은 배신이었다. 반면 앞으로도 계속 그 상대와 게임을 해야 한다는 조건에서는 협력이 최선의 전략이었다. 같은 사람과 여러 번 게임을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음 전략을 정할 수 있다. 내가 배신하면 상대가 보복할 것이며 상대도 이를 알고 있으므로 서로 협력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게임을 단 한 번만 할 경우에는 상대방의 행동에 대응할 방법도 기회도 없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배신이 최선이다. 요컨대 우리가 어떤 게임을 할 때 신뢰와 불신을 가르는 기준은 그 게임의 반복 여부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고부담 시험은 어디에 속할까? 일회성인가, 아니면 여러 번 같은 게임을 반복할 기회가 있나? ‘고부담’이라는 말 자체가 그 시험 한 번에 많은 것이 걸려 있다는 뜻이다. 즉 고부담 시험은 일회성 게임이고, 그 때문에 협력보다는 배신을 조장한다.
우리가 일회성의 고부담 시험 앞에서 어떤 배신을 해왔던가? 사교육 자체가 배신이다. 배신이 너무 만연되어 배신임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공교육 시스템은 원래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상태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전제 아래 설계되었다. 이런 전제가 유지되어야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보고 그의 잠재력을 평가할 수 있다. 또 시험 결과를 학생이 학교에서 배우고 집에서 숙제를 하며 익힌 지식과 기술의 결과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어떤 학생이 과외를 통해 그 학기에 배울 내용을 미리 공부하고 학교에 온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당연히 나머지 학생들보다 시험성적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원래 능력보다 더 우수한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학생들이 이 학생의 배신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이제 모든 학생이 미리 한 학기 앞서 공부를 한다. 그러면 처음 배신한 학생의 이점이 사라진다. 그다음부터 악순환이 시작된다. 배신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하게 배신한다. 모두 한 학기를 미리 공부하면 이번엔 다음 1년 치를 미리 공부한다. 물론 다른 학생들도 곧 이를 따라 한다. 배신이 배신을 낳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더 센 배신을 하는 배신의 증폭이 일어난다.
《시험인간》의 저자들은 미리 준비하는 자가 최후의 승자라고 말하며 선행학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중심에 고부담 시험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 단 한 번으로 합격과 탈락, 대학을 넘어 평생을 지배해버리는 시험으로 인해 한국의 시험인간들은 아무도 믿지 못하고, 사회적 자본도 없이 각자도생하는 삶을 반복한다. 세상은 평등과 정의, 공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불신과 불안, 배신이 한국 사회 전반에 담겨 있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협력 대신 배신을 먼저 배우는 사람들. 최후에 웃기 위해 타인을 배신하는 데 익숙해진 시험인간들은 사회적 자본의 구축은커녕 더더욱 고립되고 시야가 좁아진다.
6. 시험중독 사회를 풀기 위한 해법
- 대답 대신 대안을 상상하라!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시험사회를 해체하라거나 시험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의 저자들은 탈시험사회를 위해서 시험에 대해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험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좋은 시험’은 여전히 필요하다. 시험은 다음 학습을 위한 기초 자료가 될 수 있으며, 성장기 학생들에게 학습을 기억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수와 등급은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신념 속에 유년부터 청년까지 경쟁의 노예가 되고 있다. 그 질주 속에서 삶은 어떻게 일그러지고, 사회는 얼마나 비인간화되는가. 저자들은 그 이면을 놓치지 않으며, 대안을 이야기한다.
우선 좋은 시험은 학습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학습의 즐거움은 자발성과 필요성이 전제될 때 가능해진다. 또한 좋은 시험은 개인의 능력과 자질, 좁게는 학업성취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김기헌 박사와 장근영 박사는 최근 E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를 인용하며 어떤 시험이 좋은 시험인지를 말해준다. 이 프로그램은 시험의 긍정적인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장기간의 실험을 통해 보여줬다. 학생들은 매주 쪽지시험을 보는데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고 성적에 반영되지도 않는다. 놀랍게도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 쪽지시험을 통해 학생들은 놀라울 정도의 성취를 보여줬다. 이는 교사의 주입식 교육보다 시험이라는 도구를 활용한 학생의 인출식 학습이 학습의 성취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선발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이 좋은 시험이 되기 위해서는 평가자의 전문성과 헌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국립영화학교(Femis)에서 학생을 선발하는 입시 절차를 살펴보자. 필기시험에서는 영화 한 편을 골라 처음, 중간, 마지막 대목을 5분씩 보여주고 이를 분석하는 내용을 적도록 한다. 이에 대한 평가는 심사위원 두 명이 참여한다. 이때 한 수험생에 대한 두 사람의 점수가 3점 넘게 차이가 나면 학교장이 채점한 두 사람을 불러 의견을 듣는다. 그리고 한 사람이 점수를 조정하든가, 학교장이 중재하는 절차를 밟는다. 놀랍게도 이런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영화 전문가로서 하나의 영화를 보고 분석한 글에 대해 비슷한 평가의 방식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시험을 통해 좋은 인재를 뽑기 위해 한 사회가 얼마나 노력하고 시간을 투자하는지를 보여준다. 선발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은 선발하고자 하는 사람으로부터 기대하는 능력과 자질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이는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도 도움이 된다. 준비해야 할 분야가 매우 좁고 해당 분야를 철저하게 학습해 대비하면 되기 때문이다.
《시험인간》의 저자들은 시험이 지닌 관성의 힘과 시험을 통한 선발과 보상이라는 우리 사회의 지위 배분 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벗어나, 학생들이 시험인간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다양한 활용 방식을 제안한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교실에서 진행해볼 수 있는 실험들을 뉴질랜드와 일본의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자신의 핵심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수업시간의 축소가 선제적으로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또한 인공지능과 함께할 미래를 위해 미국의 특이점 대학과 싱귤래리티 대학의 커리큘럼을 소개하며, 교과목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은 낙오를 동력으로 삼는 살얼음판 위에서의 경쟁을 우리는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폭주하는 사회를 멈추기 위해서는 단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다. 사회적 자본이 상실된 시대에서 타인을 믿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지침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 책은 “공부를 못하면 추울 때 찬 데서 일하고,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한다”는 말을 당연히 여기는 사회에 일침을 가하며,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라고 말한다. OECD 국가 중 한국은 저출산을 넘어 인구 자연 감소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대량고용 시대에는 소수의 몇몇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중요하다. 공정하고 평등하며 정의로운 세상은 고부담 시험사회를 벗어남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상을 누릴 권리가 있고,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책이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
사회학자×심리학자, 시험중독에 빠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진단하다!
1. 당신은 몇 등급의 인간입니까?
- 사회학자와 심리학자, 시험중독에 빠진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진단하다!
# 5살 아인이는 매주 원어민 선생님과 영어 과외를 하고 있다. 친구들과 놀고 싶지만, 영어유치원에 가면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꾹 참고 있다.
# 10살 새롬이는 모 대학 부설 수학영재교육원에 입학하기 위해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원으로 간다. 벌써 6학년 과정에 들어갔지만, 최소 중3까지는 미리 해두어야 합격할 수 있다는 말에 잠을 줄이고 있다.
# 14살 수연이는 자유학기제 동안 진로와 미래를 탐색하는 대신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특목고와 자사고가 폐지되도 엘리트 고등학교는 남을 거라고 부모님이 이야기해주셨기 때문이다.
# 유명한 외고에 다니는 진욱이는 끝이 없는 수행평가 지옥과 내신 준비, 그리고 수능 최저기준에 맞추기 위해 수면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한다.
# 은유 씨는 대학에 입학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지만 토익을 비롯해 수능과 비슷한 대기업 인적성검사를 준비하며 20대 초중반을 보내고 있다.
# 명수 씨는 공무원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20대 중후반은 물론 30대까지 시험에 매달린다. 명수 씨의 큰 형은 승진시험 때문에 퇴근 후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명수 씨의 아버지는 은퇴 이후에도 직업을 얻기 위해 다양한 자격증시험을 공부하고 있다. 일하기 위해서 자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유아부터 은퇴를 앞둔 노년기까지, 한국 사회는 시험에서 합격해야만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경쟁 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왔다. 시험중독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온 사회 구성원들이 시험에 매달린다. 각 시험에 따라 매뉴얼과 공략법이 있고, 그대로 따르면 삶이 정해진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는 이미 시험공화국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험을 통해 소수의 합격자와 다수의 불합격자를 가르는 사회 속에서 모든 개인은 낮은 자존감, 자기효능감, 자기주도성의 상실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객관식 지필시험이 인간을 평가하는 도구가 되면서 사회가 획일화된다는 단점도 잘 알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경쟁 체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현상을 유지시키는 핵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현재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며, 청년 및 청소년 연구를 진행 중인 사회학자 김기헌 박사와 심리학자인 장근영 박사는 이 현상의 핵심에 ‘시험’이 자리하고 있으며, ‘시험’이 모든 사회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시험인간》은 사회학자와 심리학자가 만나 시험을 곧 공정함이라 믿는 한국 사회만의 특징과 시험을 대하는 한국인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 최초의 책이다.
2. 왜 한국에서 시험이 문제인가?
- 시험공화국 속 시험인간의 탄생
한국의 시험은 단순히 자기 능력을 측정하고 학습의 방향을 정하는 ‘수단’이 아니다. 영유아기부터 영어유치원 선발을 위해 시험을 준비하고, 초등학생이 되면 영재원에 합격하기 위해 사교육을 시작한다. 특목고 진학을 위해 중학교부터 성적을 관리하고, 고등학생이 되면 내신 등급을 올리기 위해 시험지 유출마저 일어나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이곳에서 시험은 인생의 길목마다 자리해 합격과 불합격을 결정하는, 개인에게 큰 위험부담을 전가하는 ‘고부담 시험(high stake exam)’이다. 저자들은 한국 사회를 지배한 고부담 시험이, 선발과 경쟁에 익숙한 ‘시험인간’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선발과 경쟁을 가르는 시험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시험에 따른 사회적 보상이야말로 다툼의 여지없는 가장 공정한 방식이 아닌가! 이 책은 시험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에 따른 결과에 철저히 복종하는 시험인간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시험은 원래 ‘목표-내용-평가’라는 일련의 교육과정 속에서 교육 목표가 온전히 달성되었는지를 측정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시험을 통해 교육 내용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그리고 시험 결과를 통해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험은 개개인의 성취도와 성장가능성을 높여가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시험은 전혀 다르게 작동한다. 오직 합격과 선발을 위해서만 움직인다. 전체 인원 중에 10명만 선발하고, 합격 커트라인도 10명이 몇 점을 받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평가도구로 사용되는 시험은 70점을 받던 학생이 80점을 받으면 성장가능성을 인정받지만, ‘고부담 시험’문화에서는 합격 커트라인이 90점이라면 80점은 불합격자의 점수일 뿐이다. 시험 결과에 따라 개인의 삶이 달라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변한다. 합격과 선발에 모든 것을 베팅하는 사람들은 성장가능성이나 과정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오직 시험에 길들여지고, 출제자의 의도대로 자신의 사고를 조정하며, 시험이 준비한 길을 정답으로 여기는 ‘시험인간’으로 자라난다.
《시험인간》의 저자들은 이대로 시험인간들의 세상이 계속될 경우, 승자독식으로 인한 갑질과 불평등 문제, 시험만이 공정하다는 맹신 속에서 사회 제도를 비판적으로 볼 수 없다는 측면을 책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들의 결론은 오랫동안 추적해온 연구결과와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독자들에게 더 입체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시험인간》은 우리가 그토록 숭배해온 시험의 본질을 해부하면서 시험에 집착하는 이유를 묻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다가올 시대는 정답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 능력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시험인간으로 채워진 사회는 새 시대를 만들 수 없다. 이 책은 서열화와 경쟁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한국 사회를 바라보던 저자들이 만나 던지는 질문들은 시험이라는 존재 기반을 흔들기 시작한다. 나를 증명하는 뿌리 깊은 기반이 흔들리면서 독자들은 탈시험인간의 형태와 ‘좋은 시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이 책은 시대의 한계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바깥을 상상하는 놀라운 여정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러기 위해 시험인간들이 유지될 수 있는 기반을 먼저 살펴야 한다. 시험중독이 될 수밖에 없는 여건, 시험공화국이 굳건해질 수 있는 생각들은 일종의 신화와 같다. 저자들은 의심 없이 믿고 있는 시험인간들의 신화를 하나씩 해체한다.
3. 시험인간들이 믿는 신화 1
- 시험은 공정하다!
거의 모든 지필시험은 응시생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문제를, 동일한 시간 동안 풀게 되어 있다. 수능시험은 사용하는 필기구조차 똑같다. 따라서 이 장면만 보면 모든 수험생이 똑같은 조건에서 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단 시험장에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오는 수험생과 부모의 차를 타고 오는 수험생이 있지 않던가. 시험 전날까지 어떤 교육,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거기에서 어떤 공정성을 발견할 수 있나?
시험의 공정성은 신화다. 더욱 큰 문제는 그 신화에 의존할 때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당연히 여기고,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공정한 시험에 순종하지 않는 자로 외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고 절차의 공정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사실상 진짜 공정성을 추구할 기회를 포기하고, 허울뿐인 공정성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감추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라는 지적은 여러 곳에서 제기되어왔다.
저자들은 교육평론가의 이범의 글을 인용하며, 한국이 교육을 통해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절차의 공정성이 아닌 경제적 공정성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6・25전쟁 전후에 한국에서는 소작농들이 자신이 경작하던 농지를 소유할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이 열렸다. 실제로 1945년 말 전체 농지의 35퍼센트에 불과하던 자작지(소유자가 경작하는 농지)의 면적이 1960년에 이르면 전체 농지의 65퍼센트로 증가한다. 1960년 당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균등하게 토지가 분배된 나라였다. 이렇게 대다수의 농부가 재산을 보유하자, 이들은 농지라는 자본을 이용해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개천에서 난 용이 된 것이다. 당시 한국과 비슷한 경제적 여건이었던 페루, 콜롬비아,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들과의 차이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 나라에서는 농부들이 아무리 자녀에게 고등교육을 시키고 싶어도 값비싼 대학 학비를 조달할 능력이 없었다. 교육이 정체되자 경제성장에도 한계가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론에서 지적했듯, ‘교육에서 공정성을 논의할 때만큼은 교육 여건의 불평등이나 교육 정의의 문제보다 유독 공정한 대입 경쟁 문제에만 집중하는’ 양상이 벌어진다. 수능점수는 순수한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반영한 것이고, 이 점수에 따라 보상을 달리하는 사회체계를 정당한 것이라 여기는 믿음은 그저 미신일 뿐이다. 논란이 되었던 드라마
4. 시험인간들이 믿는 신화 2
- 일등만 하면, 합격만 하면 행복이 보장된다!
합격과 불합격, 선발에서 승리하기 위해 시험인간들은 수면시간을 줄이며 공부에 매진한다. 그렇다면 시험인간들의 공부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까? 학자들의 분석과 언론을 통해 알려진 시험인간들의 공부 방식은 ‘나’의 생각을 지우는 ‘무비판적 암기’와 ‘출제자의 의도에 충실히 따르는 답안 작성’에 있다. 이 책의 저자들 역시 또한 출제자의 의도에 맞춰 정답을 알아내기 위해 반복 학습을 진행하는 과정을 시험 훈련이라고 말한다.
시험 훈련의 문제는 비판적인 사고력을 키울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이다. 4차산업혁명 사회에서는 인간의 비판적 사고와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문제당 30초 이내에 답을 적어야 하는 수능시험에서 비판적 사고는 방해가 될 뿐이다. 시험 훈련은 수능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나라 대학 교육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들은 서울대생을 대상으로 한 그들의 학습법을 분석한다. 공부를 열심히 오래한 학생이라고 해서 반드시 학점이 높지 않았다. 자기만의 생각보다 ‘교수가 말한 걸 그대로 따라 적는 학생’들의 성적이 매우 높았다. 게다가 수능시험과 닮은 대기업 인적성 시험에서도 시험 훈련은 유효하다.
오직 ‘시험’에 통과하기 위한 공부는 ‘나’라는 존재를 삭제함으로써 가능하다. 시험인간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이 할 일은 자신의 생각이 시험이 묻는 정답의 구조와 최대한 유사하게 닮아가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사춘기 시절에 다가오는 성장에 대한 질문이나 고민도 시험을 핑계로 끊임없이 유예시킨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뭘 해야 할지 자신만의 진로가 만들어지지 않아 타인의 삶을 참조하는 현상이 계속되는 것이다.
내가 삭제된 공부, 학습의 주체가 사라진 공부는 호흡이 길 수가 없다. 생각의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서 지식을 쌓는 것은 성취처럼 보이지만 극심한 자기 소외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 부자연스러움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유인동기가 필요하게 되고, 그 자리에 바로 ‘합격자라는 권력’이 자리 잡는다. 이들은 시험에 통과하면 대우를 받고, 통과하지 못하면 추락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합격자라는 경험을 한번 맛보게 되면 절대 놓을 수 없다. ‘내가 공부를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시험인간》의 저자들은 중학생을 대상으로 행복도를 조사한 바 있다. 이들의 답변은 시험인간들의 심성을 정확히 드러낸다. 행복도 조사에 답변한 학생들은 남보다 성적이 좋을 때 행복하고, 남보다 성적이 떨어졌을 때 우울해진다고 답변했다. 합격과 1등이라는 시험인간의 정체성은 시험 결과에 따라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공부를 할수록 계속해서 자신을 상실하고, 타인의 기준을 삶의 나침반으로 삼는 시험인간들은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시험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만드는 데 익숙한 인간들은 또 다른 시험 앞에서 긴장하고, 합격하지 못할까 불안해한다. 합격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안과 열패감이다.
5. 시험인간들의 신화 3
- 미리 준비하는 자가 최후에 웃는 자가 된다!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은 한 개인이 참여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통하여 이용할 수 있는 자본을 말한다. 사회적 자본은 결국 사람이다. 서로 어려울 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고, 고민을 터놓고 상담할 수 있는 친구. 어떤 일을 함께할 수 있는 듬직한 동료.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내 편이 되어줄 거라 믿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 이런 사회적 자본이 있어야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풍요롭지만 불안한 이유는 사회적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자본은 타인에 대한 신뢰다. 그런데 신뢰는 도움을 주고받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고부담 시험은 협력보다는 경쟁과 배신을 유도한다. 고부담 시험이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기 때문이다.
《시험인간》의 저자들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어떤 전략이 최선인지 시뮬레이션한 내용을 한국의 선행학습(사교육) 시장과 연결시킨다. 게임의 조건인 협력과 배신 중 최선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단 하나였다. 그건 ‘이 게임을 단 한 번만 하고 끝내느냐’ 아니면 ‘같은 상대와 여러 번 게임을 하느냐’였다. 상대방과 한 번씩만 하는 조건일 때, 최선의 전략은 배신이었다. 반면 앞으로도 계속 그 상대와 게임을 해야 한다는 조건에서는 협력이 최선의 전략이었다. 같은 사람과 여러 번 게임을 하면 상대방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음 전략을 정할 수 있다. 내가 배신하면 상대가 보복할 것이며 상대도 이를 알고 있으므로 서로 협력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게임을 단 한 번만 할 경우에는 상대방의 행동에 대응할 방법도 기회도 없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배신이 최선이다. 요컨대 우리가 어떤 게임을 할 때 신뢰와 불신을 가르는 기준은 그 게임의 반복 여부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고부담 시험은 어디에 속할까? 일회성인가, 아니면 여러 번 같은 게임을 반복할 기회가 있나? ‘고부담’이라는 말 자체가 그 시험 한 번에 많은 것이 걸려 있다는 뜻이다. 즉 고부담 시험은 일회성 게임이고, 그 때문에 협력보다는 배신을 조장한다.
우리가 일회성의 고부담 시험 앞에서 어떤 배신을 해왔던가? 사교육 자체가 배신이다. 배신이 너무 만연되어 배신임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공교육 시스템은 원래 모든 학생들이 동일한 상태에서 교육을 받는다는 전제 아래 설계되었다. 이런 전제가 유지되어야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보고 그의 잠재력을 평가할 수 있다. 또 시험 결과를 학생이 학교에서 배우고 집에서 숙제를 하며 익힌 지식과 기술의 결과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어떤 학생이 과외를 통해 그 학기에 배울 내용을 미리 공부하고 학교에 온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당연히 나머지 학생들보다 시험성적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 원래 능력보다 더 우수한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학생들이 이 학생의 배신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이제 모든 학생이 미리 한 학기 앞서 공부를 한다. 그러면 처음 배신한 학생의 이점이 사라진다. 그다음부터 악순환이 시작된다. 배신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더 강력하게 배신한다. 모두 한 학기를 미리 공부하면 이번엔 다음 1년 치를 미리 공부한다. 물론 다른 학생들도 곧 이를 따라 한다. 배신이 배신을 낳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더 센 배신을 하는 배신의 증폭이 일어난다.
《시험인간》의 저자들은 미리 준비하는 자가 최후의 승자라고 말하며 선행학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중심에 고부담 시험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 단 한 번으로 합격과 탈락, 대학을 넘어 평생을 지배해버리는 시험으로 인해 한국의 시험인간들은 아무도 믿지 못하고, 사회적 자본도 없이 각자도생하는 삶을 반복한다. 세상은 평등과 정의, 공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불신과 불안, 배신이 한국 사회 전반에 담겨 있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협력 대신 배신을 먼저 배우는 사람들. 최후에 웃기 위해 타인을 배신하는 데 익숙해진 시험인간들은 사회적 자본의 구축은커녕 더더욱 고립되고 시야가 좁아진다.
6. 시험중독 사회를 풀기 위한 해법
- 대답 대신 대안을 상상하라!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시험사회를 해체하라거나 시험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의 저자들은 탈시험사회를 위해서 시험에 대해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시험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좋은 시험’은 여전히 필요하다. 시험은 다음 학습을 위한 기초 자료가 될 수 있으며, 성장기 학생들에게 학습을 기억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수와 등급은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신념 속에 유년부터 청년까지 경쟁의 노예가 되고 있다. 그 질주 속에서 삶은 어떻게 일그러지고, 사회는 얼마나 비인간화되는가. 저자들은 그 이면을 놓치지 않으며, 대안을 이야기한다.
우선 좋은 시험은 학습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학습의 즐거움은 자발성과 필요성이 전제될 때 가능해진다. 또한 좋은 시험은 개인의 능력과 자질, 좁게는 학업성취도를 높이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김기헌 박사와 장근영 박사는 최근 E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를 인용하며 어떤 시험이 좋은 시험인지를 말해준다. 이 프로그램은 시험의 긍정적인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장기간의 실험을 통해 보여줬다. 학생들은 매주 쪽지시험을 보는데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고 성적에 반영되지도 않는다. 놀랍게도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 쪽지시험을 통해 학생들은 놀라울 정도의 성취를 보여줬다. 이는 교사의 주입식 교육보다 시험이라는 도구를 활용한 학생의 인출식 학습이 학습의 성취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선발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이 좋은 시험이 되기 위해서는 평가자의 전문성과 헌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국립영화학교(Femis)에서 학생을 선발하는 입시 절차를 살펴보자. 필기시험에서는 영화 한 편을 골라 처음, 중간, 마지막 대목을 5분씩 보여주고 이를 분석하는 내용을 적도록 한다. 이에 대한 평가는 심사위원 두 명이 참여한다. 이때 한 수험생에 대한 두 사람의 점수가 3점 넘게 차이가 나면 학교장이 채점한 두 사람을 불러 의견을 듣는다. 그리고 한 사람이 점수를 조정하든가, 학교장이 중재하는 절차를 밟는다. 놀랍게도 이런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영화 전문가로서 하나의 영화를 보고 분석한 글에 대해 비슷한 평가의 방식을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시험을 통해 좋은 인재를 뽑기 위해 한 사회가 얼마나 노력하고 시간을 투자하는지를 보여준다. 선발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은 선발하고자 하는 사람으로부터 기대하는 능력과 자질에 철저하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이는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도 도움이 된다. 준비해야 할 분야가 매우 좁고 해당 분야를 철저하게 학습해 대비하면 되기 때문이다.
《시험인간》의 저자들은 시험이 지닌 관성의 힘과 시험을 통한 선발과 보상이라는 우리 사회의 지위 배분 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벗어나, 학생들이 시험인간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다양한 활용 방식을 제안한다. 학생 수가 줄어드는 교실에서 진행해볼 수 있는 실험들을 뉴질랜드와 일본의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자신의 핵심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수업시간의 축소가 선제적으로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또한 인공지능과 함께할 미래를 위해 미국의 특이점 대학과 싱귤래리티 대학의 커리큘럼을 소개하며, 교과목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책은 낙오를 동력으로 삼는 살얼음판 위에서의 경쟁을 우리는 멈출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폭주하는 사회를 멈추기 위해서는 단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다. 사회적 자본이 상실된 시대에서 타인을 믿고 앞으로 나가기 위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지침을 제공해줄 것이다. 이 책은 “공부를 못하면 추울 때 찬 데서 일하고,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한다”는 말을 당연히 여기는 사회에 일침을 가하며,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라고 말한다. OECD 국가 중 한국은 저출산을 넘어 인구 자연 감소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대량고용 시대에는 소수의 몇몇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중요하다. 공정하고 평등하며 정의로운 세상은 고부담 시험사회를 벗어남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세상을 누릴 권리가 있고,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책이 변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
목차
1장 대한민국은 어떻게 시험공화국이 되었나
1 ‘영유 캐슬’부터 ‘장시생’까지, 한국인의 생애별 시험 준비
-시험으로 시작해 시험으로 끝나다
-대체 30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2 우리는 왜 시험에 올인하는가
-시험중독 사회의 여섯 가지 특징
-한국 사회는 시험을 통해 발전했다
-능력의 점수화와 인간의 숫자화
-시험의 투명성, 공정성을 집어삼키다
3 한국에서 수험생으로 산다는 것의 진짜 의미
-내신과 수능, 두 마리 토끼의 덫
-〈SKY 캐슬〉과 그림자 교육
-죄수의 딜레마 게임과 불신
-시험을 위해 수면을 포기하다
4 취준생과 공시생, 노오오력의 역설
-눈물겨운 대기업 취업 성공기
-‘이공계 기피’에서 ‘문송’까지, 전공 사다리의 변화
-공무원, 최고의 직업이 되다
-컵밥을 낳은 공시생의 삶
-공시생의 저연령화와 장기화
5 시험은 아무 잘못이 없다
-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터널비전과 집단사고
-강남 8학군 아파트 가격의 비밀
2장 불신과 불공정이 낳은 슬픈 자화상
1 우리는 왜 차별에 찬성하게 되었나
-‘승자’와 ‘패자’라는 정체성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시험의 배신
-‘고정 마인드셋’의 세상
2 한 줄 세우기의 나라
-수직계열화를 이룩한 유일한 나라?
-‘특별한 자’가 되기 위한 비용
3 공정이라는 미신
-플린 효과와 수능시험의 상관관계
-한때나마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던 이유
4 가장 똑똑한 청년, 가장 멍청한 중년이 되다
-공부를 할수록 뒤처지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선행학습이 앗아간 즐거움
-놀라움과 재미가 없는 텅 빈 공부
5 매뉴얼과 공략법, 순종의 결과
-모든 답은 ‘전과’ 속에
-생각하지 않을수록 점수는 높아진다
-고인 물들의 고인 학문
3장 대답 대신 대안을 상상하다
1 시험 너머를 상상하다
-북유럽에서 시작된 교육혁명
-교육과정을 바꾼 뉴질랜드의 도전
-살아가는 힘을 강조한 일본
-미네르바와 특이점 실험
-인공지능이 채용을 대신하다
2 그들은 왜 시험방식을 탈피했는가
-저출산, 경쟁의 장점을 무너뜨리다
-정보의 홍수가 가져온 변화
-지식 대신 태도와 행동에 주목하다
3 탈시험인간,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다
-문제 풀이에서 문제 내기로
-대입 개편 방향, 시험을 보는 이유에서 찾다
-이미 시작된 채용 혁신, 공공부문에 달렸다
-탈시험인간과 ‘좋은 시험’
후기. 한 걸음 더 내딛기 위하여
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