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2023년 BEST 30
가족을 폐지하라: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는 법
- 저자
- 소피 루이스 지음;, 성원 번역
- 원저자
- Sophie Anne Lewis
- 발행사항
- 파주: 서해문집, 2023
- 형태사항
- 184 p: 삽도, 19cm
- 서지주기
- 참고문헌을 포함하고 있음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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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가능 (1) |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 00031842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31842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책 소개
대안 가족은 대안이 될 수 없다
‘가족’은 대안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원한다,
가족의 대안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세상이 아니라,
가족이 없는 것이 또 하나의 재앙인 세상이 아니라,
가족이 아니고도 우리 서로를 돌보고 환대해줄 세상을.
팬데믹이 이어지는 동안 국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자택에 머무십시오.”
이 명령에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는 모두에게 자택이, 즉 격리 가능한 공간이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모두에게 가족이, 즉 자가 격리를 하더라도 돌봐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자택은 누구의 공간인가? 바로 가족의 공간이다). 이런 명령에 가족 구성원들이 전업주부처럼 집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가족이 돌봄은커녕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도. 그렇다면 가족이 없는 이들은? 그들은 정책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이다. 그리하여 봉쇄의 시대에 많은 이들이 끔찍한 가족과 같이 지내는 것보다 더 나쁜 운명을 맞닥뜨렸으니,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식료품, 약, 생필품 등을 전부 배달 주문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은 환경에 있는 이들(배달비를 낼 여력이 없을 수도, 소도시에 거주할 수도, 홈리스일 수도 있다)은 홀로 앓았다. 팬데믹은 사회가 돌봄을 사적 책임으로 밀어넣은 결과를, 즉 돌봄이 부재하다시피 취약해진 모습을 비참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가족을 폐지하자고?
이 말은 어떤 반응을 끌어내기도 전에 사고를 정지시킬지 모른다. 가족은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주택 정책·의료·교육·유서·법원·연금 등 가족 제도를 유지시키는 기술이 어디에나 포진해 있다. 가족은 (온갖 재난 서사가 보여주듯이) 다른 모든 게 무너져 내렸을 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라는 꿈에 둘러싸여 있는 장소다. 한편으로 그곳에서는 은밀한 학대와 성폭력과 갈취가 가해지며, 로맨틱한(물론 이성애 규범적인) 환상이 아직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장소이자, 공공연한 계급 결합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이 다층적인 의미만큼이나 가족을 둘러싼 담론은 걷어차일 만큼 많고 (그만큼) 단단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이 폐지할 수 있는 무언가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폐지될 수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든다.
분명 ‘가족을 폐지하라’는 말이 어떤 부분에서는, 가령 혈연 공동체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할 수밖에 없었던) 유색인종의 역사에서, 혹은 가족 구성권을 요구하는 퀴어 공동체에게, 혹은 시리아나 예멘,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혈육과 생이별을 하고서 난민캠프에서 지내는 이들에게는 기상천외한 헛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가족 폐지보다는 확대가족이나 대안가족을 요구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가족을 아예 폐지하자는 주장은 너무 위험하고, 전략적이지도 못하고, (부정적인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여기서 《가족을 폐지하라》는 ‘우리가 폐지하기를 주장하는 가족은 백인-부르주아-핵가족이라고!’ 같은 식으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쪽을 택하지 않는다. 규범적인 텍스트에서 훌쩍 떨어져 서 있는 이 책은, 수많은 반론들에 다시 수많은 반론들로 맞서지도 않는다. 백인 지배계급과 흑인 프롤레타리아의 가족관계가 어떻게 다른지 파고들면서(2장), 또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에서부터 21세기 트랜스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가족 폐지론의 역사를 빠르게 조망하면서(3장) ‘가족’이 부르주아 경제의 축소판임을, 그것이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돌봄을 사적인 문제로 치부한다는 것을 내포한 단어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을 되돌린다. 가족을 폐지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지.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럼 가족 말고 다른 어떤 대안이 있느냐고.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의료 노동자들과 돌봄 노동자들은 기진맥진한 채 나가떨어지지 않았느냐고. 이는 사실상 질문이 아니라 대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언이다. 돌봄 시설이 문을 닫을 때,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이들은? 환자들은? 가족이 없으면 누가, (혹은) 무엇이 이들의 삶을 책임지겠는가?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이런 식의 질문은 나쁜 질문이다. 우리는 비인간 동물이 동물원 밖에서 지내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아무리 대안적인 서식지가 희소해지고, 심지어 동물들이 동물원의 잔혹한 환경에 익숙해졌다 해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가족에서 벗어나, 가족이 아닌 다른 대안을 세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이 유일한 해결책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아니, 가족이 유일한 해결책으로서의 역할도 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이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 질문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좀 더 나은 삶이 “확장된”, “확대된”, “혈연과 무관한” 온갖 대안적인 가족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 가족이 없는 자리, 그것이 아예 무너진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가족이 빠져나간 자리에 놓을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는 대신에, 아무것도 없음을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가족을 폐지하라》는 바로 그런 사고 실험이자,혁명적 제안이며, 선언문이다.
‘가족’은 대안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원한다,
가족의 대안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세상이 아니라,
가족이 없는 것이 또 하나의 재앙인 세상이 아니라,
가족이 아니고도 우리 서로를 돌보고 환대해줄 세상을.
팬데믹이 이어지는 동안 국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자택에 머무십시오.”
이 명령에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는 모두에게 자택이, 즉 격리 가능한 공간이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모두에게 가족이, 즉 자가 격리를 하더라도 돌봐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다(자택은 누구의 공간인가? 바로 가족의 공간이다). 이런 명령에 가족 구성원들이 전업주부처럼 집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않았다. 가족이 돌봄은커녕 폭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도. 그렇다면 가족이 없는 이들은? 그들은 정책에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이다. 그리하여 봉쇄의 시대에 많은 이들이 끔찍한 가족과 같이 지내는 것보다 더 나쁜 운명을 맞닥뜨렸으니,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 식료품, 약, 생필품 등을 전부 배달 주문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은 환경에 있는 이들(배달비를 낼 여력이 없을 수도, 소도시에 거주할 수도, 홈리스일 수도 있다)은 홀로 앓았다. 팬데믹은 사회가 돌봄을 사적 책임으로 밀어넣은 결과를, 즉 돌봄이 부재하다시피 취약해진 모습을 비참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가족을 폐지하자고?
이 말은 어떤 반응을 끌어내기도 전에 사고를 정지시킬지 모른다. 가족은 마치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주택 정책·의료·교육·유서·법원·연금 등 가족 제도를 유지시키는 기술이 어디에나 포진해 있다. 가족은 (온갖 재난 서사가 보여주듯이) 다른 모든 게 무너져 내렸을 때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라는 꿈에 둘러싸여 있는 장소다. 한편으로 그곳에서는 은밀한 학대와 성폭력과 갈취가 가해지며, 로맨틱한(물론 이성애 규범적인) 환상이 아직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장소이자, 공공연한 계급 결합이 이루어지는 장소다. 이 다층적인 의미만큼이나 가족을 둘러싼 담론은 걷어차일 만큼 많고 (그만큼) 단단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이 폐지할 수 있는 무언가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폐지될 수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든다.
분명 ‘가족을 폐지하라’는 말이 어떤 부분에서는, 가령 혈연 공동체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할 수밖에 없었던) 유색인종의 역사에서, 혹은 가족 구성권을 요구하는 퀴어 공동체에게, 혹은 시리아나 예멘,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혈육과 생이별을 하고서 난민캠프에서 지내는 이들에게는 기상천외한 헛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은 가족 폐지보다는 확대가족이나 대안가족을 요구하는 게 더 나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가족을 아예 폐지하자는 주장은 너무 위험하고, 전략적이지도 못하고, (부정적인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일 뿐이라고 지적하면서.
여기서 《가족을 폐지하라》는 ‘우리가 폐지하기를 주장하는 가족은 백인-부르주아-핵가족이라고!’ 같은 식으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쪽을 택하지 않는다. 규범적인 텍스트에서 훌쩍 떨어져 서 있는 이 책은, 수많은 반론들에 다시 수많은 반론들로 맞서지도 않는다. 백인 지배계급과 흑인 프롤레타리아의 가족관계가 어떻게 다른지 파고들면서(2장), 또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들에서부터 21세기 트랜스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가족 폐지론의 역사를 빠르게 조망하면서(3장) ‘가족’이 부르주아 경제의 축소판임을, 그것이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돌봄을 사적인 문제로 치부한다는 것을 내포한 단어임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을 되돌린다. 가족을 폐지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지.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럼 가족 말고 다른 어떤 대안이 있느냐고.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의료 노동자들과 돌봄 노동자들은 기진맥진한 채 나가떨어지지 않았느냐고. 이는 사실상 질문이 아니라 대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언이다. 돌봄 시설이 문을 닫을 때,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이들은? 환자들은? 가족이 없으면 누가, (혹은) 무엇이 이들의 삶을 책임지겠는가?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이런 식의 질문은 나쁜 질문이다. 우리는 비인간 동물이 동물원 밖에서 지내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아무리 대안적인 서식지가 희소해지고, 심지어 동물들이 동물원의 잔혹한 환경에 익숙해졌다 해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가족에서 벗어나, 가족이 아닌 다른 대안을 세우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가족이 유일한 해결책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아니, 가족이 유일한 해결책으로서의 역할도 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좀 더 나은 삶이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 질문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좀 더 나은 삶이 “확장된”, “확대된”, “혈연과 무관한” 온갖 대안적인 가족이 있는 자리가 아니라 가족이 없는 자리, 그것이 아예 무너진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가족이 빠져나간 자리에 놓을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는 대신에, 아무것도 없음을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가족을 폐지하라》는 바로 그런 사고 실험이자,혁명적 제안이며, 선언문이다.
목차
그치만 난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구!
어떤 가족을 폐지한다는 거야?
가족 폐지론의 간략한 역사
가족의 대안도, 확장도 아닌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