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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불평등한 어린시절: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불평등의 대물림

원서명
Unequal childhoods : class, race, and family life
원저자
Lareau, Annette
발행사항
서울: 에코리브로, 2012
형태사항
p560 : 삽도, 22cm
서지주기
참고문헌과 색인을 포함하고 있음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00023533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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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23533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책 소개
교육도 결국은 대물림되는가? 그 질문에 실증적으로 답하다

이 책은 한마디로 ‘교육’에 관한 책이다. 더구나 굉장히 실증적인 책인데, 그것도 무척이나 미시적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전에 생각해야 할 사실은 과연 미국 사회와 교육에 관한 책의 내용이 과연 우리 실정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기우에 불과하다. 사회적 배경과 제도가 다르긴 하지만 교육이라는 공통분모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책 《불평등한 어린 시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범주화’와 앞에서도 말한 ‘실증’이다. 저자 아네트 라루는 미국 가정을 계층과 인종이라는 기준으로 범주화한 뒤 그들의 삶 속으로 직접 뛰어 들어간다. 물론 미국 사회에서 이러한 범주화는 민감한 문제다. 라루 역시 이 점을 인식하고 인정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이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그녀의 설명은 두 갈래로 나뉜다. 우선 우리는 사회적 가치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상대적인 요인을 이해해야 한다. 그녀는 오늘날의 부모 세대는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의 문화적 논리 아래에서 성장해왔음을 지적하며 ‘집중 양육 전략’은 현 시대에서 우위를 보이는 아동 양육의 문화적 논리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두 번째 해석의 관점이 제기된다. 사회 구성원, 특히 경제적?문화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부모 세대는 말 그대로 사회를 구성하는 일부분인 동시에 사회의 논리와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회에서 자녀의 집중 양육 전략이 더 가치 있는 양식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이를 적용하는 계층이 사회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출생과 동시에 이러한 배경 속에 놓이는 것이다.
책 전체를 정말 짧게 요약한 두 번째 단락에서 우리는 사회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계층과 그렇지 못하는 계층이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이 두 계층이 각각 서로 다른 자녀 양육 방식―집중 양식과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을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저자의 문제 제기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자녀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여러 미국의 사회적 조건들을 신중하게 검토한 후 피부 색깔에 관계없이 선정한 9세와 10세 아이를 둔 열두 가정을 중산층(상위 중산층 포함)?노동자 계층?빈곤층으로 나누어(구체적인 방법론은 이 책 2장을 참조하라) 심층 탐구하고 인터뷰한 결과, 문화적 구조에 불평등이 있음을 발견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가정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 모여 자녀 교육에 대한 문화적인 논리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각 가정의 차이는 의미 있는 유형으로 범주화(앞에서 이미 언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중산층 부모들을 자녀 교육과 관련해 아이의 집중 양육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 부모들은 자연적 성장을 통한 성취를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각 계층에 따른 차이를 더욱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 열두 가정을 적절히 분리하고, 세 측면으로 나누어 양육 방식의 범주화를 시도한다. 1부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양상을 분석하고, 2부에서는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하여 계층적 특징들을 범주화하며, 3부에서는 가정생활과 공공 기관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양상들이 각 계층별로 어떻게 다른지 분석한다.
사회 계층적 차이는 아이의 일상생활 중 세세한 부분에서 드러난다. 중산층 가정의 삶은 노동자 계층이나 빈곤층 가정의 삶과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중산층 가정의 삶은 빽빽하게 짜인 일정에 따라 돌아간다. 부모들은 이런저런 활동으로 정신이 없고, 특히 둘 이상의 자녀를 둔 부모는 아이들 각자의 활동이 겹치면서 발생하는 갈등을 중재하느라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낸다. 이들 가정은 식료품이나 의류를 구매하고 자동차와 주택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 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등의 일상 활동에 필요한 돈이 부족하지는 않다. 물론 이들도 경제적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원하는 곳으로 여름휴가를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수준의 걱정이다. 이들 가정에서 자녀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서 수백수천 달러를 쓰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중산층 부모는 아이들에게 많은 야외 활동을 시키고, 이러한 활동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들 가정에서 모든 스케줄은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형제자매들은 (자의든 타의든) 언제나 붙어 다니고, 부모에게 여가 시간이란 이들의 활동을 지켜보는 게 전부다. 아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어른의 공간에서 어른의 지도를 받으며 보낸다.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로운 여가는 연이어 잡혀 있는 일정 사이에 틈틈이 끼어 있는 자투리 시간이 고작이다. 중산층 가정의 일상은 자녀의 흥미와 학교 밖 활동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 가정의 하루는 중산층 가정과 사뭇 다르다. 우선 그들은 중산층 가족이 느끼지 못하는 경제적 문제로 고민한다. 특히 빈곤층 가정의 하루는 일로 시작해서 일로 끝난다. 엄마는 오르지 않는 월급으로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을 먹여 살릴 걱정을 하느라 밤을 지새우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거나 아이들의 빨래거리를 공용 세탁소까지 들고 가느라 길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도 한다. 엄마의 아침은 막내를 깨워 밥을 먹이고 씻겨 학교에 보내느라 순식간에 지나간다. 아이들 역시 부모의 경제적 사정을 눈치 채고 있다. 돈 문제로 언성을 높이는 일도 흔하다.
경제 사정은 좋지 않지만 아이들의 삶은 비교적 안정적이다. 무엇보다도 이 아이들의 삶은 중산층 아이들에 비해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 밖으로 나가 다른 아이들과 뛰어놀 수 있으며, 친척을 만나 노는 경우도 자주 있다. 일부 아이들은 학교 밖 생활에 참여하기도 하지만, 중산층 가정의 자녀만큼은 아니다. 학교 밖 활동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경제적 사정이나 교통 불편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아이들이 때때로 집에서 이런저런 활동으로 자신의 재능을 뽐내더라도, 어른은 그 재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또 자녀를 학교 밖 활동을 하는 장소까지 자동차로 태워다주거나 조직 활동을 지도해주는 경우도 드물다.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의 자녀는 전반적으로 부모에게 예속되지 않은 생활을 한다. 노동자 계층과 빈곤층 아이들은 이웃의 또래 친구와 어울려 놀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등 자유로운 시간을 스스로 채워나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어른들 세계와 아이들 세계 사이의 구분은 더욱 명확해진다.
요약하면, 사회 계층의 차이는 아이가 참여하는 학교 밖 활동의 수나 가족생활의 흐름, 가족의 경제적 고민, 자유롭게 놀며 보내는 일상의 시간, 자녀의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부모에 대한 자녀의 예속 정도 등의 측면에서 두드러진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사회 계층의 요인으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성별의 차이 역시 많은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에 비해 한층 정적인 놀이를 즐기며, 집에서 먼 곳까지 가서 노는 경우도 적다. 물론 인종적 차이 역시 중요한 고려 요인이다. 특히 인종에 따라 나뉘는 주거 단지 구성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같은 인종의 친구만 사귀도록 만든다.
2부를 보면, 각 가정은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언어 사용법을 가르친다고 한다. 6장과 7장에서 만나는 두 가정의 사례는 언어 사용 방법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알렉산더가 속한 흑인 중산층 가정은 언어를 언어 그 자체로 사용한다. 이들 가족은 언어를 언어 그 자체로 즐기며, 언어 사용 자체에서 본질적 즐거움을 찾는다. 단어의 여러 의미를 토론하기도 하고, 부모는 언어를 자녀 훈육의 주요 메커니즘으로 삼기도 한다. 이러한 양육 방식은 보통 광범위한 토론과 협상 그리고 일상생활 속의 작은 투덜거림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부모의 이런 양육 방식 덕분에 알렉산더는 풍부한 언어 소통 능력을 얻는다(더 자세한 내용은 6장 참조). 반면 다른 가정들에서, 특히 해럴드 맥앨리스터가 속한 흑인 빈민층 가정에서 언어는 기능적인 역할만 담당한다. 가족은 언어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매우 분명하게 전달한다. 아빠와 장을 보러간 해럴드가 살구색 목욕 타월을 단호히 거절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정에서는 의사 표현을 위해 적은 수의 단어만을 사용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부모와 자녀 간의 광범위한 협상 대신 주로 아이들에게 일방적인 명령을 내리는 편이고, 때로는 명령과 함께 체벌에 대한 위협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 결과 아이들은 어른의 말에 말대답을 거의 하지 않고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이 부모에게 칭얼대는 모습은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지만, 노동자 계층 및 빈곤층 가정에서는 그런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언어적 의사소통이야말로 아이의 어휘력 및 독해 능력을 기르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가정에서의 언어 사용이 아이의 학습능력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는 또한 미래의 사회생활에서도 중요한 능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계층 및 빈곤층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어른과 협상하는 경험을 쌓을 기회가 거의 없다.
3부에서 다루는 가정과 공공 기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에서도 사회 계층적 차이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가정의 품을 벗어나 점차 외부 세계로 나아간다. 아이들은 법적으로 의무 교육을 받기 때문에 학교는 아이들의 삶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많은 아이들은 어른이 정해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내야 한다. 반면 사촌들과 어울려 놀거나 텔레비전을 보기도 하고, 밖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등 좀더 자유롭고 자율적으로 생활하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의 활동 반경이 가정으로부터 외부로 넓어지는 과정에서, 부모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나 사랑은 사회 계층에 관계없이 한결같다. 하지만 교육 기관에 대한 자녀의 불만에 부모, 그중에서도 엄마들의 대응 방식은 사회 계층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중산층 가정의 엄마들은 적극적으로 아이가 겪는 문제 상황에 개입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부모의 이런 개입이 좋은 결과를 불러올 때도,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이 부모들은 그런 시도 자체만으로도 자녀에게 “거절에 굴복하지 않고” 교육 기관의 요직에 앉아 있는 인물에게 압력을 행사해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방법을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반면에 노동자 계층 및 빈곤층 부모들은 주로 교사나 전문가에게 자녀 교육의 주도권을 전적으로 넘겨주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주도권 포기는 그러나 이 계층의 부모들이 자녀의 교육 문제에 대해서만 보이는 특징적인 현상으로, 다른 일에 대해서는 이들도 쉽사리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드라이버 부인은 스스로 “화끈한 성격”이라고 얘기하며, 임대인과 말싸움에서도 결코 지지 않는다(자세한 내용은 10장 참조). 하지만 학교와 관련한 문제에서는 평소보다 훨씬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다. 학교 자체가 집중 양육 방식을 중심으로 고안된 교육 기관이며 교사들 역시 이에 따라 자녀의 학습에 적극 개입해주길 바라기 때문에, 드라이버 부인 같은 수동적 태도는 아이의 학업 성취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처럼 세 측면에서 사회적 계층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았다. 다시 한 번 이를 전체적으로 개괄해보자.
흑인이든 백인이든 관계없이 중산층 아이들은 중산층 특유의 새로운 권리에 대한 의식을 보여준다. 이 아이들은 자신의 취향이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며, 교육 기관에서도 여유롭고 능동적인 태도로 교류를 주도한다. 또 중산층 아이들은 자유롭고 정보를 공유하고 남의 이목을 끄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다. 개중에 남들보다 덜 사교적인 아이도 있지만, 중산층 자녀들은 전반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조정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물론 중산층 아이들이 모든 사교적 기술에 능숙한 것은 아니다. 여름 방학이나 주말 동안 시간을 체계적으로 보내는 일이나 어른들과 떨어져 오랫동안 지내는 일, 혹은 어른들과 관계에서 나서지 않고 복종하는 일 등에서는 꽤 서투르다. 하지만 중산층 아이들은 (어른들을 보고 따라 하거나 직접적인 가르침을 통해) 어떻게 해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쪽으로 인간관계가 흘러가는지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논리적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가정교육이 훗날 아이가 각종 사회 기관에서 수행하게 될 협상에서도 잠재적으로 이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권위 있는 어른들 역시 아이의 이런 상호 관계 설정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중산층 아이들은 이익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대변하며, 선생님이나 의사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절차를 조절해달라고 개별적으로 요청한다.
이와 반대로 노동자 계층 및 빈곤층 자녀들의 경우는 각종 기관과의 상호 작용에서 스스로 제약받는다는 느낌을 의식한다. 빈곤층 자녀들은 자신의 욕구에 맞춰 상호 관계를 조정하는 경우가 드물다. 노동 계급인 부모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은 기관 내의 권위 있는 어른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비록 이따금 은근히 반항하는 아이도 있지만 말이다.) 노동자 계층 및 빈곤층 부모 중 일부는 자녀의 학교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자녀가 숙제를 잘 하지 않아도 이를 모르고 지나친다. 또 학교 규칙을 불합리한 것으로 치부하는 부모도 있다. 예를 들어 웬디 드라이버 엄마는 학교에서 웬디를 괴롭히는 남자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애를 “때려버려라” 하고 얘기하기도 한다(8장). 노동자 계층의 부모들은 또한 ‘학교’에 자신의 우려 사항을 전달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중산층 아이들은 전문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진행될 때마다 훗날 유용하게 쓰일 ‘문화자본(개인이 물려받아 여러 기관을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가치로 전환할 수 있는 기술들)’을 축적한다. 그러나 노동자 계층 및 빈곤층 아이들은 기관과 직면했을 때 그 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성인이 되어 유용하게 쓸 문화자본 역시 축적하지 못한다. 바로 이런 정당성 부여 패턴 때문에 집중 양육 방식으로 교육받은 아이들은 권리에 대한 인식이라는 이점을 선물로 받는 한편, 자연적 성장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점차 제약에 대한 인식을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다.

미국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성취를 그 사람의 개인적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개인이 이루어낸 성과는 그 개인의 노력이나 재능과 결부된다. 이러한 신념이야말로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지탱하는 뼈대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인들은 실제로 개인이 갖는 주도권은 쉽게 인정하면서도 사회적 계급의 위력을 인정하지 못한다.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역시 과반수의 미국인이 자신의 성취가 개인적인 노력 덕분이라고 믿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체 인구의 5분의 1도 채 안 되는 사람만이 “인종, 종교 또는 계층이 ‘인생에서 앞서 나가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유럽인과 비교하면, 훨씬 많은 미국인이 개인의 노력에 따라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성실히 일하고 규칙을 지키면, 신께서 주신 재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사회적으로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큼의 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미국식 이념은 부자와 빈자를 막론하고 과반수의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이다.
그렇지만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미국 사회가 계층화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각 계층이 가지고 있는 자원들은 자손에서 자손으로 세습된다. 따라서 저자는 육아에 작용하는 문화적 논리와 그러한 논리가 가정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런데 저자가 별도로 부록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연구는 피에르 부르디외에게 빚진 바가 크다.
그의 작업은 사회 계층적 위치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데 구조적 배경을 제공해준다. 그의 모델은 갈등과 변화 그리고 구조적 불평등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또한 구조와 기관 사이의 유동성을 강조한다. 이런 사회화는 아이들에게 훗날 무엇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인지에 대한 기준이 된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아비투스(habitus)’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또한 이와 같은 배경적 경험은 개인이 이전 세대에서 물려받아 사회 속의 다양한 현장(field)을 마주하는 상황에서 이용하는 자본의 양과 형태를 형성하기도 한다. 즉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이 사회적 지위나 특권을 누리게 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특히 사회 특권층에 속한 개인이 획득하는 이득은 그들의 문화적 경험을 기초로 형성된 내적 요소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가정 내에서 이뤄지는 문화적 훈련이 사회의 주요 기관들에서 서로 다른 가치를 부여받는 이유를 특권층 가정에서의 표준적인 아동 양육 전략이 사회 기관들이 강조하는 가치와 많은 부분에서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반적으로 피에르 부르디외의 작업은 구조적 불평등의 역학 모델을 제시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작업은 자본 소유와 그 자본의 발현 사이의 차이에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또한 그는 기관 내에서 ‘문지기’나 의사 결정권자 역할을 하는 개인들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 라루는 부모가 어떻게 서로 다른 습관을 자녀들에게 전달하고 이러한 습관이 특정 기관과의 관계 형성 과정에서 어떤 문화적 자본으로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 발현 방식에 따라 이문화적 자본이 어떻게 교육적 가치를 창출하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다시 말해서 라루의 연구는 실증적 방법론을 이야기하며 ‘어떤’ 양육 전략과 행동 양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부모들이 ‘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러한 접근법 덕분에 그녀의 연구는 시대적 보편성이라는 가치를 확보할 수 있다.
목차
목차 감사의 글 01 집중 양육과 자연적인 성장을 통한 성취 02 사회 구조와 일상생활 1부 일상생활 속 활동 03 빽빽한 일정으로 이루어진 집중 양육 방식: 개릿 탈링거의 사례 04 자녀의 페이스에 맞추는 교육 방식: 티렉 테일러의 사례 05 아이들을 위한 아이들만의 놀이: 케이티 브린들의 사례 2부: 언어 사용 06 자녀 개발: 알렉산더 윌리엄스의 사례 07 언어는 사회생활을 위한 매개체: 해럴드 맥앨리스터의 사례 3부 가정생활과 공공 기관 08 사회 속에서의 집중 양육: 스테이시 마셜의 사례 09 빗나간 집중 양육 방식: 멜라니 핸드론의 사례 10 교육 기관에 대한 양육 주도권 양도: 웬디 드라이버의 사례 11 체벌과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 리틀 빌리 야넬리의 사례 12 사회 계층의 힘과 한계 부록 A 방법론: 현장 연구에서 발생하는 딜레마 해결하기 부록 B 이론적 배경: 피에르 부르디외의 작업에 대한 이해 부록 C 보충 자료 주 옮긴이의 글 참고문헌 찾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