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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 00024269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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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024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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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책 소개
불평등은 진공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음은 누가 봐도 자명해 보인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욱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갈수록 가난해지고 그 수가 많아지며, 중산층은 공동화되고 있다. 중산층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감소하고 있고, 중산층과 부유층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불평등은 꾸준히 증가해 왔지만, 금융 위기와 대침체를 통해 최근 몇 년 사이 불평등은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해졌다.
이토록 불평등이 심화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스티글리츠는 이 책에서 불평등이 경제뿐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와 사법 체계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세계화와 통화 정책, 예산 정책 등 정부의 각종 정책이 불평등의 심화에 어떻게 기여해 왔는지를 분석한다. 나아가 비범한 통찰력으로 보다 정의롭고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며 그러한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불평등이 사회에 해로운 이유는 단지 그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불평등은 비효율적이다. 부유층은 상위 1퍼센트의 이익이 나머지 99퍼센트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관념을 심어 주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중산층과 빈민층을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스티글리츠는 이 책에서 오늘날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이런 불평등을 초래한 방식이 어떻게 경제 성장을 저해하고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 준다.
불평등은 진공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의 힘과 정치적 권모술수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우리의 정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희생시키면서 상위 계층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시장을 형성해 왔다. 정책적 대안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대안들이 채택될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희망의 불꽃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1퍼센트의, 1퍼센트를 위한, 1퍼센트에 의한
오랫동안 미국은 기회의 땅으로 여겨져 왔다. 미국은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들도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성공하고 부자가 될 수 있는 그런 나라였다. 아메리칸 드림은 실재했다. 하지만 스티글리츠는 미국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미국은 “1퍼센트의, 1퍼센트를 위한, 1퍼센트에 의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 스티글리츠의 진단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에서만 약 800만 가구가 살던 집을 떠나야 했고, 수백만 가구가 멀지 않은 장래에 담보 주택을 압류당할 처지에 놓였으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가구가 평생 모아 온 돈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실직자가 된 사람들은 모아 두었던 돈을 다 써버렸고, 실업 급여 재원도 바닥이 났다. 학자금 대출금 수만 달러를 떠안은 채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층은 어딜 가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금융 위기 초기에 자기 집에서 쫓겨나 친구 집이나 친척 집을 전전하던 사람들은 이제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 주택 시장 호황기에 구입했던 주택들은 팔려고 내놓아도 사려는 사람이 없거나 헐값에 넘어갔고 수많은 주택들이 빈집으로 남겨졌다. 지난 십 년간 유지되었던 금융 시장 호황의 부실한 토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반면 상위 1퍼센트는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2008년 금융 위기 이전 호황기에 상위 1퍼센트는 국민 소득의 65퍼센트 이상을 거머쥐었다. 또한 2010년 미국이 대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때, 상위 1퍼센트는 이른바 회복기에 창출된 추가 소득의 93퍼센트를 가져갔다. 지난 삼십 년간 하위 90퍼센트의 임금은 15퍼센트 증가한 반면 상위 1퍼센트의 임금은 150퍼센트 증가했고, 상위 0.1퍼센트로 범위를 좁히면 증가율은 무려 300퍼센트에 이른다. 또한 약 삼십 년 전 상위 1퍼센트가 국민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12퍼센트에 불과했지만, 현재 그 비율은 두 배 이상 늘은 25퍼센트로 증가해 있다. 월마트 가문의 상속자 6인의 재산은 미국 하위 30퍼센트의 재산을 모두 합친 것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미국의 불평등 수준은 대공황 이래 전례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누가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가 ― 문제는 정치다!
“불평등은 정치 시스템 실패의 원인이자 결과다. 불평등은 경제 시스템의 불안정을 낳고, 이 불안정은 다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악순환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불평등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시장만이 아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불평등의 대부분은 정부 정책, 즉 정부가 한 일과 정부가 하지 않은 일의 결과다. 현대 경제에서는 정부가 게임의 규칙을 결정한다. 즉 무엇이 공정한 경쟁인지, 무엇이 경쟁을 저해하며 불법적인 행위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부다. 또한 정부는 조세 제도와 사회 복지 지출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한다. 그리고 상속세와 무상 의무 교육을 통해 부의 역학을 변화시킨다. 정부가 이런 기능을 어떤 식으로 수행하느냐에 따라 불평등의 수준은 달라진다. 기업을 통제하는 법률은 기업 경영진의 행동 규범과 기업 경영진 및 노동자, 주주, 채권 소유자 간의 수익 분배 방식을 결정한다. 거시 경제 정책은 실업 수준과 노동자들에게 분배될 몫을 결정하는 시장의 힘에 영향을 미친다. 통화 당국이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높은 실업률을 유지하는 정책을 실시하면 임금 인상은 억제된다.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정치가 있다.
정부에는 불공정 행위를 막기 위해 시장을 감시하고 규제할 책임이 있다. 실제로 각 분야에는 규제 기구들이 있다. 문제는 상위 1퍼센트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들의 관점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이 기관의 책임자로 앉힌다는 데 있다. 규제의 대상이 되는 부문 출신 사람들이 규제 기구의 책임자로 임명되고, 이들이 다시 규제의 대상이 되는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이른바 회전문 현상이다.
조세 정책 또한 불평등의 심화에 기여한다. 클린턴 행정부가 자본 이득 세율을 35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낮춘 것은 갑부들에게 세금 우대를 해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위 90퍼센트 소득자가 올리는 자본 이득은 다 합쳐 봐야 자본 이득 전체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반면 상위 400위 이내 고소득자의 경우, 총소득에서 임금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8.8퍼센트에 불과하고, 자본 이득이 소득의 57퍼센트, 이자 소득 및 배당 이득이 소득의 1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총소득의 74퍼센트가 낮은 세율의 적용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세율 인하 조치 덕분에 2008년에 일인당 3,000만 달러, 2007년에는 4,500만 달러를 가만히 앉아서 자기 호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2008년에 120억 달러, 2007년에 18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의 조세 수입이 사라진 셈이다. 결과적으로 2007년 일반 납세자들은 소득의 20.4퍼센트를 세금으로 낸 반면, 상위 400위 이내 고소득자들은 소득의 16.6퍼센트만을 세금으로 냈다. 지대 추구 게임에서 승리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거머쥔 이들은 여기에 더하여 자신들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들보다 소득에서 더 적은 비율의 세금을 내고 있다.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 전쟁 ― 시장의 실패냐 정부의 실패냐
시장은 정치에 의해 규정된다. 즉 경제 게임의 규칙은 정치에 의해서 결정되고, 경기장은 상위 1퍼센트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대체 왜 그럴까? 그 해답의 일부는 정치 게임의 규칙 역시 상위 1퍼센트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데 있다. 상위 계층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일이 나머지 99퍼센트에게도 이로운 일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상위 1퍼센트의 이익과 99퍼센트의 이익은 명백히 다르다. 상위 계층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관념을 대중들에게 심기 위한 관념 전쟁에 몰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주류 경제학은 개인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다르다. 만일 그렇다면, 광고가 활용될 여지는 전혀 없을 것이다. 관념과 인식은 사회적 구성물이다. 사회에서 어떤 관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관념은 통념이 된다. 인식을 둘러싼 전쟁이 가장 맹렬하게 진행되는 전장은 바로 대원칙을 둘러싼 전장이다. 한쪽 진영에는 시장이 자력으로 순조롭게 움직이며 대부분의 시장 실패는 사실상 정부 실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서 있고, 다른 쪽 진영에는 시장을 그다지 낙관적으로 보지 않고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서 있다. 시장 실패와 정부 실패를 둘러싼 전쟁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 전쟁이다.
우파의 주장만 들어 온 사람은 시장은 항상 순조롭게 움직이고 정부는 항상 실패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파는 이런 대중적 인식을 형성하기 위해서 민간 시장의 실패 사례와 정부의 성공 사례를 무시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또한 이들은 개인적 수익과 사회적 수익이 일치하지 않을 때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실을 보는가를 애써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도 이를 무시하게 하려고 많은 공을 들여왔다. 하지만 지난 경제 위기를 통해 대중은 이 게임에서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실을 보는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근거 없는 신화들 ― 문제는 공급이 아니라 수요다
공급 주도 경제학 신화는 부유층에 대한 과세는 생산 활동과 저축을 위축시키고, 그로 인해서 부유층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와 이론은 공급 주도 경제학에 대한 강력한 반증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공급이 아니라 수요다. 대기업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투자를 할 만한 현금을 확보하고 있지만, 이들이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수요가 없다면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서는 수요를 자극할 최선의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중하위 계층의 소득이 늘어나면 수요는 늘어난다.
최악의 신화는 예산을 긴축하면 경제가 회복되고 정부 지출이 늘어나면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정부의 예산은 한 가구의 예산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모든 가구는 벌어들인 수입 이내에서 생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을 국가 예산에 간단히 적용할 수는 없다. 재정 지출이 늘어나면 일자리가 늘어나고, 실업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이 일자리에 충원되어 생산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구의 수입을 넘어선 지출은 거시 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한 국가의 정부가 수입을 넘어서는 지출을 하면 거시 경제에 변화가 일어난다. 정부가 지출한 금액의 몇 갑절에 이르는 규모로 국내 총생산이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 지출은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또 실제로도 그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국내 총생산 증가와 정부 지출 증가 간에는 승수 효과가 있다. 금융업자들과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이 경제 위기의 대응 방안으로 고려하는 임금 삭감과 예산 삭감은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상위 1퍼센트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임금이 삭감되고,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 강화되면 자신들의 수익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출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전제하에서만 통하는 이야기다. 더구나 금융업자들의 주된 관심은 늘 자기 수중에 들어오는 수익에 있다. 이들은 자기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가구의 사정을 상상한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은행에 갚을 수 있는 돈이 늘어난다. 그러나 한 가구의 사정을 보고 한 나라 경제의 사정을 유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부 지출이 줄어들면 수요가 줄어들고 일자리가 줄어든다. 한 가구가 소득이 줄어드는 바람에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면, 지출이 줄어도 은행에 돈을 갚을 여력은 늘지 않는다. 이것은 경제학이 입증해 온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 99퍼센트와 1퍼센트의 자각
요즘 이십대 젊은이들이 처한 곤경보다 오늘날의 현실을 더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 많은 젊은이들이 열정과 희망을 품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에 빠져 지낸다. 이들은 앞으로 힘겹게 상환해야 할 학자금 대출금이라는 무거운 짐에 짓눌린 채 침체된 시장에서 일자리를 찾아다닌다. 운이 좋아서 직장을 구한다 해도 이들이 받는 임금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부모들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이들은 자식들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집을 잃지나 않을까? 조기 퇴직을 당하지는 않을까? 저축해 둔 돈을 까먹고 있는데, 과연 그 돈으로 노후 생활을 지탱할 수 있을까? 이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일들이 세계 전역의 많은 나라들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시장 경제 불변의 법칙이 아니다.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근본적인 가치관에 더욱 부합하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더 많은 기회와 더 높은 국민 소득, 더 강건한 민주주의, 그리고 대다수 성원들에게 더 높은 삶의 질이 보장되는 사회다. 보다 효율적인 경제와 보다 공정한 사회는 시장을 시장답게, 즉 경쟁을 강화하고 착취는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시장의 과도한 방종을 완화할 때 탄생한다. 게임의 규칙은 경제 시스템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소득 분배의 효율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나쁜 규칙은 경제의 효율성을 저하시키고 사회의 분열을 촉진한다.
상위 계층은 정치적 지배력을 이용하여 신념과 정책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강화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지배력을 더욱 강화해 왔다. 우리는 사회의 공정성을 강화하여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대공황 당시 케인스는 종국에는 시장의 힘이 승리하여 경제를 완전 고용 상태로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응수했다. “맞다. 장기적으로 시장은 효율을 달성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시장의 힘은 현재 우리 사회의 심각한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정치는 이러한 시장의 힘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평등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시장의 힘을 재조정해야 한다. 개혁은 두 가지 경로로 이루어질 수 있다. 첫 번째 경로는 하위 99퍼센트 소득층이 자신들이 상위 1퍼센트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으며, 상위 1퍼센트에게 이로운 것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이 아님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두 번째 경로는 상위 1퍼센트가 심각한 불평등이 자신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상위 1퍼센트가 아무리 많은 돈을 써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운명이 나머지 99퍼센트의 운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인식이다. 역사적인 경험을 돌이켜 보면, 그들은 언젠가는 이를 깨닫는다. 문제는 너무 늦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불평등의 대가』와 한국의 현실
미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불평등을 핵심어로 삼아 적나라하고 통렬하게, 그러면서도 학자적 엄격성을 가지고 해부하고 있는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미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많은 학자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불평등의 심화는 단지 미국만이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거의 전 세계가 불평등이 일으키는 악순환의 소용돌이에 빨려들고 있다. “이 책의 지적과 분석이 가장 잘 들어맞는 나라는 미국 다음에 한국”이라는 선대인의 지적처럼 현재 한국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상황은 미국의 상황과 너무나 닮아 있다. 많은 서민들이 주택 가격 폭락과 치솟은 대학 등록금,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등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복지 확대와 경제 민주화가 정치권과 대다수 국민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 데는 그것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불안정해진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관념은 현실을 반영한다.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현재의 불평등 수준은 완화되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스티글리츠가 지적하고 있듯이, “기회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오늘의 현실은 미래에는 불평등의 수준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대물림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것이다. 공교육이 갈수록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스티글리츠가 우려하는 기회의 불평등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스티글리츠는 시장은 도덕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시장이 대다수 국민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꾸준히 관리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불평등이 심화되면 그것은 단지 경제적 문제를 넘어 국가의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심하게 훼손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개인들이 자신이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끼는 정도가 희박해지면서 국가의 존재 이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대안은 분명히 존재한다.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을 제거하기만 해도 불평등 수준은 한층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장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과 필요한 개혁의 방향과 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지혜다. 이 책은 이 두 가지 모두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이다.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 즉 양극화와 빈부 격차의 해결 없이는 한국 사회와 국가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봐야 할 필독서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음은 누가 봐도 자명해 보인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욱 큰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갈수록 가난해지고 그 수가 많아지며, 중산층은 공동화되고 있다. 중산층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감소하고 있고, 중산층과 부유층 사이의 간극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불평등은 꾸준히 증가해 왔지만, 금융 위기와 대침체를 통해 최근 몇 년 사이 불평등은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해졌다.
이토록 불평등이 심화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스티글리츠는 이 책에서 불평등이 경제뿐 아니라 우리의 민주주의와 사법 체계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세계화와 통화 정책, 예산 정책 등 정부의 각종 정책이 불평등의 심화에 어떻게 기여해 왔는지를 분석한다. 나아가 비범한 통찰력으로 보다 정의롭고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하며 그러한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불평등이 사회에 해로운 이유는 단지 그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불평등은 비효율적이다. 부유층은 상위 1퍼센트의 이익이 나머지 99퍼센트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관념을 심어 주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중산층과 빈민층을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스티글리츠는 이 책에서 오늘날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이런 불평등을 초래한 방식이 어떻게 경제 성장을 저해하고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 준다.
불평등은 진공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장의 힘과 정치적 권모술수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우리의 정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희생시키면서 상위 계층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시장을 형성해 왔다. 정책적 대안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대안들이 채택될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희망의 불꽃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1퍼센트의, 1퍼센트를 위한, 1퍼센트에 의한
오랫동안 미국은 기회의 땅으로 여겨져 왔다. 미국은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들도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성공하고 부자가 될 수 있는 그런 나라였다. 아메리칸 드림은 실재했다. 하지만 스티글리츠는 미국은 더 이상 기회의 땅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미국은 “1퍼센트의, 1퍼센트를 위한, 1퍼센트에 의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 스티글리츠의 진단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미국에서만 약 800만 가구가 살던 집을 떠나야 했고, 수백만 가구가 멀지 않은 장래에 담보 주택을 압류당할 처지에 놓였으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가구가 평생 모아 온 돈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실직자가 된 사람들은 모아 두었던 돈을 다 써버렸고, 실업 급여 재원도 바닥이 났다. 학자금 대출금 수만 달러를 떠안은 채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층은 어딜 가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금융 위기 초기에 자기 집에서 쫓겨나 친구 집이나 친척 집을 전전하던 사람들은 이제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 주택 시장 호황기에 구입했던 주택들은 팔려고 내놓아도 사려는 사람이 없거나 헐값에 넘어갔고 수많은 주택들이 빈집으로 남겨졌다. 지난 십 년간 유지되었던 금융 시장 호황의 부실한 토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반면 상위 1퍼센트는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2008년 금융 위기 이전 호황기에 상위 1퍼센트는 국민 소득의 65퍼센트 이상을 거머쥐었다. 또한 2010년 미국이 대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때, 상위 1퍼센트는 이른바 회복기에 창출된 추가 소득의 93퍼센트를 가져갔다. 지난 삼십 년간 하위 90퍼센트의 임금은 15퍼센트 증가한 반면 상위 1퍼센트의 임금은 150퍼센트 증가했고, 상위 0.1퍼센트로 범위를 좁히면 증가율은 무려 300퍼센트에 이른다. 또한 약 삼십 년 전 상위 1퍼센트가 국민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12퍼센트에 불과했지만, 현재 그 비율은 두 배 이상 늘은 25퍼센트로 증가해 있다. 월마트 가문의 상속자 6인의 재산은 미국 하위 30퍼센트의 재산을 모두 합친 것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미국의 불평등 수준은 대공황 이래 전례 없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
누가 게임의 규칙을 만드는가 ― 문제는 정치다!
“불평등은 정치 시스템 실패의 원인이자 결과다. 불평등은 경제 시스템의 불안정을 낳고, 이 불안정은 다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악순환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불평등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다.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시장만이 아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불평등의 대부분은 정부 정책, 즉 정부가 한 일과 정부가 하지 않은 일의 결과다. 현대 경제에서는 정부가 게임의 규칙을 결정한다. 즉 무엇이 공정한 경쟁인지, 무엇이 경쟁을 저해하며 불법적인 행위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부다. 또한 정부는 조세 제도와 사회 복지 지출을 통해 소득을 재분배한다. 그리고 상속세와 무상 의무 교육을 통해 부의 역학을 변화시킨다. 정부가 이런 기능을 어떤 식으로 수행하느냐에 따라 불평등의 수준은 달라진다. 기업을 통제하는 법률은 기업 경영진의 행동 규범과 기업 경영진 및 노동자, 주주, 채권 소유자 간의 수익 분배 방식을 결정한다. 거시 경제 정책은 실업 수준과 노동자들에게 분배될 몫을 결정하는 시장의 힘에 영향을 미친다. 통화 당국이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 높은 실업률을 유지하는 정책을 실시하면 임금 인상은 억제된다.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정치가 있다.
정부에는 불공정 행위를 막기 위해 시장을 감시하고 규제할 책임이 있다. 실제로 각 분야에는 규제 기구들이 있다. 문제는 상위 1퍼센트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들의 관점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이 기관의 책임자로 앉힌다는 데 있다. 규제의 대상이 되는 부문 출신 사람들이 규제 기구의 책임자로 임명되고, 이들이 다시 규제의 대상이 되는 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이른바 회전문 현상이다.
조세 정책 또한 불평등의 심화에 기여한다. 클린턴 행정부가 자본 이득 세율을 35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낮춘 것은 갑부들에게 세금 우대를 해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위 90퍼센트 소득자가 올리는 자본 이득은 다 합쳐 봐야 자본 이득 전체의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반면 상위 400위 이내 고소득자의 경우, 총소득에서 임금 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8.8퍼센트에 불과하고, 자본 이득이 소득의 57퍼센트, 이자 소득 및 배당 이득이 소득의 1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총소득의 74퍼센트가 낮은 세율의 적용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이러한 세율 인하 조치 덕분에 2008년에 일인당 3,000만 달러, 2007년에는 4,500만 달러를 가만히 앉아서 자기 호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2008년에 120억 달러, 2007년에 180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금액의 조세 수입이 사라진 셈이다. 결과적으로 2007년 일반 납세자들은 소득의 20.4퍼센트를 세금으로 낸 반면, 상위 400위 이내 고소득자들은 소득의 16.6퍼센트만을 세금으로 냈다. 지대 추구 게임에서 승리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거머쥔 이들은 여기에 더하여 자신들보다 훨씬 가난한 사람들보다 소득에서 더 적은 비율의 세금을 내고 있다.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 전쟁 ― 시장의 실패냐 정부의 실패냐
시장은 정치에 의해 규정된다. 즉 경제 게임의 규칙은 정치에 의해서 결정되고, 경기장은 상위 1퍼센트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대체 왜 그럴까? 그 해답의 일부는 정치 게임의 규칙 역시 상위 1퍼센트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는 데 있다. 상위 계층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일이 나머지 99퍼센트에게도 이로운 일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상위 1퍼센트의 이익과 99퍼센트의 이익은 명백히 다르다. 상위 계층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관념을 대중들에게 심기 위한 관념 전쟁에 몰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주류 경제학은 개인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는 현실과 다르다. 만일 그렇다면, 광고가 활용될 여지는 전혀 없을 것이다. 관념과 인식은 사회적 구성물이다. 사회에서 어떤 관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 관념은 통념이 된다. 인식을 둘러싼 전쟁이 가장 맹렬하게 진행되는 전장은 바로 대원칙을 둘러싼 전장이다. 한쪽 진영에는 시장이 자력으로 순조롭게 움직이며 대부분의 시장 실패는 사실상 정부 실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서 있고, 다른 쪽 진영에는 시장을 그다지 낙관적으로 보지 않고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서 있다. 시장 실패와 정부 실패를 둘러싼 전쟁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 전쟁이다.
우파의 주장만 들어 온 사람은 시장은 항상 순조롭게 움직이고 정부는 항상 실패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파는 이런 대중적 인식을 형성하기 위해서 민간 시장의 실패 사례와 정부의 성공 사례를 무시하는 등 갖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또한 이들은 개인적 수익과 사회적 수익이 일치하지 않을 때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실을 보는가를 애써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도 이를 무시하게 하려고 많은 공을 들여왔다. 하지만 지난 경제 위기를 통해 대중은 이 게임에서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실을 보는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근거 없는 신화들 ― 문제는 공급이 아니라 수요다
공급 주도 경제학 신화는 부유층에 대한 과세는 생산 활동과 저축을 위축시키고, 그로 인해서 부유층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와 이론은 공급 주도 경제학에 대한 강력한 반증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공급이 아니라 수요다. 대기업들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투자를 할 만한 현금을 확보하고 있지만, 이들이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수요가 없다면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서는 수요를 자극할 최선의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중하위 계층의 소득이 늘어나면 수요는 늘어난다.
최악의 신화는 예산을 긴축하면 경제가 회복되고 정부 지출이 늘어나면 경제가 회복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정부의 예산은 한 가구의 예산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모든 가구는 벌어들인 수입 이내에서 생활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을 국가 예산에 간단히 적용할 수는 없다. 재정 지출이 늘어나면 일자리가 늘어나고, 실업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이 일자리에 충원되어 생산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구의 수입을 넘어선 지출은 거시 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한 국가의 정부가 수입을 넘어서는 지출을 하면 거시 경제에 변화가 일어난다. 정부가 지출한 금액의 몇 갑절에 이르는 규모로 국내 총생산이 증가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 지출은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또 실제로도 그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국내 총생산 증가와 정부 지출 증가 간에는 승수 효과가 있다. 금융업자들과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이 경제 위기의 대응 방안으로 고려하는 임금 삭감과 예산 삭감은 경제를 회복시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상위 1퍼센트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임금이 삭감되고, 노동 시장의 유연성이 강화되면 자신들의 수익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출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전제하에서만 통하는 이야기다. 더구나 금융업자들의 주된 관심은 늘 자기 수중에 들어오는 수익에 있다. 이들은 자기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가구의 사정을 상상한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은행에 갚을 수 있는 돈이 늘어난다. 그러나 한 가구의 사정을 보고 한 나라 경제의 사정을 유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부 지출이 줄어들면 수요가 줄어들고 일자리가 줄어든다. 한 가구가 소득이 줄어드는 바람에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면, 지출이 줄어도 은행에 돈을 갚을 여력은 늘지 않는다. 이것은 경제학이 입증해 온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 99퍼센트와 1퍼센트의 자각
요즘 이십대 젊은이들이 처한 곤경보다 오늘날의 현실을 더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 많은 젊은이들이 열정과 희망을 품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에 빠져 지낸다. 이들은 앞으로 힘겹게 상환해야 할 학자금 대출금이라는 무거운 짐에 짓눌린 채 침체된 시장에서 일자리를 찾아다닌다. 운이 좋아서 직장을 구한다 해도 이들이 받는 임금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부모들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이들은 자식들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집을 잃지나 않을까? 조기 퇴직을 당하지는 않을까? 저축해 둔 돈을 까먹고 있는데, 과연 그 돈으로 노후 생활을 지탱할 수 있을까? 이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일들이 세계 전역의 많은 나라들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시장 경제 불변의 법칙이 아니다.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우리는 우리의 근본적인 가치관에 더욱 부합하는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더 많은 기회와 더 높은 국민 소득, 더 강건한 민주주의, 그리고 대다수 성원들에게 더 높은 삶의 질이 보장되는 사회다. 보다 효율적인 경제와 보다 공정한 사회는 시장을 시장답게, 즉 경쟁을 강화하고 착취는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시장의 과도한 방종을 완화할 때 탄생한다. 게임의 규칙은 경제 시스템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소득 분배의 효율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나쁜 규칙은 경제의 효율성을 저하시키고 사회의 분열을 촉진한다.
상위 계층은 정치적 지배력을 이용하여 신념과 정책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강화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지배력을 더욱 강화해 왔다. 우리는 사회의 공정성을 강화하여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대공황 당시 케인스는 종국에는 시장의 힘이 승리하여 경제를 완전 고용 상태로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응수했다. “맞다. 장기적으로 시장은 효율을 달성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
시장의 힘은 현재 우리 사회의 심각한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정치는 이러한 시장의 힘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평등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시장의 힘을 재조정해야 한다. 개혁은 두 가지 경로로 이루어질 수 있다. 첫 번째 경로는 하위 99퍼센트 소득층이 자신들이 상위 1퍼센트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으며, 상위 1퍼센트에게 이로운 것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것이 아님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두 번째 경로는 상위 1퍼센트가 심각한 불평등이 자신의 이익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상위 1퍼센트가 아무리 많은 돈을 써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운명이 나머지 99퍼센트의 운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인식이다. 역사적인 경험을 돌이켜 보면, 그들은 언젠가는 이를 깨닫는다. 문제는 너무 늦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불평등의 대가』와 한국의 현실
미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불평등을 핵심어로 삼아 적나라하고 통렬하게, 그러면서도 학자적 엄격성을 가지고 해부하고 있는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미국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많은 학자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불평등의 심화는 단지 미국만이 안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거의 전 세계가 불평등이 일으키는 악순환의 소용돌이에 빨려들고 있다. “이 책의 지적과 분석이 가장 잘 들어맞는 나라는 미국 다음에 한국”이라는 선대인의 지적처럼 현재 한국이 처한 사회적, 경제적 상황은 미국의 상황과 너무나 닮아 있다. 많은 서민들이 주택 가격 폭락과 치솟은 대학 등록금,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등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복지 확대와 경제 민주화가 정치권과 대다수 국민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 데는 그것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불안정해진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관념은 현실을 반영한다.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현재의 불평등 수준은 완화되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스티글리츠가 지적하고 있듯이, “기회의 불평등이 존재하는 오늘의 현실은 미래에는 불평등의 수준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대물림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것이다. 공교육이 갈수록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서, 스티글리츠가 우려하는 기회의 불평등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스티글리츠는 시장은 도덕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한다. 시장이 대다수 국민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꾸준히 관리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불평등이 심화되면 그것은 단지 경제적 문제를 넘어 국가의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심하게 훼손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개인들이 자신이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느끼는 정도가 희박해지면서 국가의 존재 이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대안은 분명히 존재한다.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을 제거하기만 해도 불평등 수준은 한층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장을 바로 볼 수 있는 능력과 필요한 개혁의 방향과 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지혜다. 이 책은 이 두 가지 모두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줄 것이다.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 즉 양극화와 빈부 격차의 해결 없이는 한국 사회와 국가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봐야 할 필독서다.
목차
목차
추천사 불평등의 대가는 아주 비싸다
해제 『불평등의 대가』와 한국의 현실
서문
보급판 서문
감사의 말
1장 1퍼센트의 나라 미국
2장 지대 추구와 불평등한 사회의 형성
3장 시장과 불평등
4장 왜 불평등이 문제인가
5장 민주주의의 위기
6장 현실로 닥친 1984
7장 만인을 위한 정의? 불평등은 어떻게 법치주의를 훼손하는가
8장 예산 전쟁
9장 1퍼센트에 의한, 1퍼센트를 위한 거시 경제 정책과 중앙은행
10장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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