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혐오 발언: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
- 발행사항
- 서울: 알렙, 2016
- 형태사항
- 367 p., 22cm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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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 00028975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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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번호
- 00028975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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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치/청구기호(출력)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책 소개
버틀러는 법적 주장과 언어 행위의 한계를 시험하는 논쟁에 멋지게 개입한다.
―호미 바바, 시카고 대학
표현의 자유의 정치에 관련되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저서다.
―드루실라 코넬, 러트거즈 대학 법대
우리에게 정치가 진지한 사유를 필요로 함을 보여주는 훌륭한 참여다.
―조나단 쿨러, 코넬 대학
이 훌륭한 저서에서 느슨한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다.
―바버라 존슨, 하버드 대학
혐오 발언에 대한 저항은 가능한가?
1990년대 미국 사회에서는 인종차별, 성적 소수자 차별, 혐오 범죄가 특히 부각되었다. 백인 소년이 흑인 가족의 집 마당에서 십자가를 태운 사건, 고등법원장 후보가 한때 부하 직원인 판사를 성적으로 추행하여 상원의원 청문회까지 열렸던 일, 영화 <미시시피 버닝>을 보고 난 후 백인을 살해한 흑인들, 로드니 킹, 동성애 차별 등이 끊이질 않았다.
2010년대 한국 사회의 흐름도 이와 비슷하다. 일베, 김치녀, 소라넷, 강남역 살인 사건, 여성 혐오 랩 가사, 퀴어문화축제, 고위 공직자의 ‘개돼지’ 발언, 데이트 폭력, 메갈리아……. 그야말로 혐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혐오 발언’의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했다.
흔히 ‘막말’이라고 하는 사태는 최근 교육부 고위 공직자의 ‘개, 돼지’ 발언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개인적 일탈 행위였다 쳐도, 그의 말은 ‘듣는 이의 따귀를 강타하고, 복부를 걷어차고, 열등한 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 책 『혐오 발언』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국가가 혐오 발언을 생산한”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논쟁적인 책 『혐오 발언』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사라 살리), “낸시 프레이저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며 토론되는 철학자 중 한 명”(리처드 로티)으로 소개되곤 하는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수행성, 패러디, 드래그 등의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이 책 『혐오 발언』에서 ‘상처를 주는 말’ 즉 혐오 발언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더 세부적으로는,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 규제의 문제, 검열과 표현의 자유 문제, 언어적인 상처, 타인의 호명으로 탄생하는 주체의 문제, 언어적 생존이나 화자의 책임 등과 같은 언어와 권력, 침묵이나 전유 그리고 저항에 관한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철학적 질문 들이다. 따라서 『혐오 발언』에서 버틀러가 던지는 이런 질문들은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한국 사회의 ‘상처를 주는 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동시대성이 존재하며 많은 사유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 책 『혐오 발언』에서 혐오 발언, 포르노그래피, 동성애자의 자기 선언, 십자가 소각, 국가 검열 문제 등 다양한 형태의 ‘상처를 주는 말’을 다룬다. 그녀는 포르노그래피와 인종차별주의가 법적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몇몇 페미니스트들과 반인종차별주의 이론가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낸다. 그녀가 비판하는 이론가들은 모두 혐오 발언을 규제하자는 어떤 ‘평등’주의적 논증을 제기한다. 즉 발언이 집단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이런 논증들을 거부한다. 궁극적으로 그녀는 혐오 발언에 대한 어떤 규제도 제정하지 말 것을 권한다. 규제는 “발언을 ‘재의미부여’하고 ‘재수행’함으로써 이런 발언에 도전하도록 일깨워질 자들을 침묵시키도록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가 비판하는 이들은 모두 ‘상처를 주는 말’에 대해, 이는 주체가 의도적으로 행사하는 차별 행위이고, 이 말들은 곧 행위가 되며 수신자를 열등한 지위로 종속시킨다는 견해를 편다. 그들은 혐오 발언이나 포르노그래피가 ‘그냥 말only words’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혐오 발언을 폭력이자 차별 행위로 간주한다.
버틀러는 어째서 이런 이론가들을 비판하는 것일까? 그녀는 혐오 발언의 이런 해악들을 부정하는 것인가?
혐오 발언을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많은 언어학자와 페미니스트 이론가, 인종이론 연구자는 혐오 언어는 그 자체로 폭력적 혐오 행위이며, 차별적 행위라며 법률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마리 마츠다는 규제나 처벌을 받지 않는 혐오 발언자는 국가 권위의 후원을 받는 것이며, 혐오 언어의 피해자는 국가가 없는 자가 된다. 그녀는 KKK단과 네오 나치의 사례를 들며 혐오 집단의 위협은 불법적인 폭력 행위 이상이며, 그들의 인종차별적 선동은 개인의 안전과 자유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본다. 따라서 이들의 혐오 발언을 방치하는 것은 사실상 그것을 지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방치는 다수자에게 소수자를 억압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가 승인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공식적인 처벌과 제제는 혐오 발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 언어에 대한 반대는 분명하게 밝히면서도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의 규제에는 반대한다. 그녀는 ‘혐오 발언’을 법적으로 규제하자는 주장하는 몇몇 페미니스트 및 반인종차별주의 이론가들과 논쟁을 벌였다.
혐오 발언은, 말만 가지고도 사회적 약자들을 예속시키는가? 포르노그래피는 여성들을 열등한 지위로 못 박아 두는가?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청자를 모욕하는 성행위인가? 버틀러는 이 책 『혐오 발언』에서 이런 견해부터 따진다. 과연 언어는 화자가 의도한 대로 타인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한 것인가? 버틀러는 이들처럼 언어가 의도한 대로 행위가 되고, 혐오 발언이나 포르노그래피가 주체를 열등한 지위로 재종속시킨다는 견해를 발언내행위론이라 지칭하여 비판한다.
그녀가 혐오 발언의 절대적 효력을 의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혐오 발언은 어쨌든 피해자에게 막대한 해악을 끼친다. 그런데, 혐오 발언은 항상 작동할까? 혐오 발언은 항상 기계적이고 정확하게 효과를 낳을까? 버틀러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버틀러 역시 혐오 발언이 어떻게 행위하고, 심지어 상처를 주게끔 행위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혐오 발언 규제의 지지자들이 기술하는 꼭 그런 방식으로 언어가 직접적이거나 인과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기에 버틀러는 혐오 발언의 규제 지지자에 대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견해를 제공하고자 한다.
버틀러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이 주체를 구성한다는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버틀러는 호명의 작동은 필연적일 수 있지만, 기계적이거나 전적으로 예측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권력은 그 권력이 행사되는 효력과는 구별된다. 오히려 권력은 일부 언어 행위 이론이 나타내는 것처럼 그렇게 식별하거나 국한하기 쉽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녀는 J.L. 오스틴과 쇼사나 펠만의 이론에 의지하여, “말의 기계적인 고장이나 ‘불발’ 그리고 예측 불가능성”(오스틴)을 재강조하고, 언어 행위는 말하는 몸의 행위로 무엇보다 육체적인 행위(쇼사나 펠만)라는 점을 재인용한다. 그리하여 버틀러는 말의 육체적인 효과는 화자의 의도를 초월한다고 설명한다. 버틀러는 이렇게 발언과 행위, 발언과 효과 사이의 ‘간격’을 주장하는, 혐오 발언에 대한 ‘발언효과행위론’을 펼친다. 버틀러에 따르면 “말하기가 그 자체로 행하기인 것은 아니며, 그것은 저항되어야만 하는 피해의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말함과 행함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비록 어렵다 하더라도 발언이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피해를 행하는지 말할 수 있는 어떤 이야기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혐오 발언은 다른 의미나 힘, 효과를 가질 수 없는가?
이처럼 언어 행위가 반드시 의도한 대로 행위하지 못한다는 특성은 혐오 발언의 효력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뜻한다. 또한 반면에 혐오 발언이 전유와 전복에 취약함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버틀러는 “만일 우리가 언명된다고 할 수 있는 ‘구조’의 시간적인 생명을 고려하게 된다면, 혐오 발언의 언어 행위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한 것으로, 즉 혁신과 전복을 당하기 좀 더 쉬운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한다.
혐오 발언 규제 옹호론자인 리처드 델가도에 따르면, ‘껌둥이nigger’와 ‘스페인놈spick’과 같은 혐오 발언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쓰일 때조차 비하의 낙인이다. 그러나 버틀러는 “그럼에도 바로 이 진술은, 그의 텍스트에서 쓰였든 여기에서 인용되었든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그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그 낱말을 방금 사용했다. (……) 그런 말들이 다른 의미들을 내포할 수 없다고 귀결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혐오 발언은 이처럼 맥락 이탈과 인용에 취약한 탈-인용 가능한 발언ex-citable인 것이다. 버틀러는 발언들은 항상 같을 수는 없으며, 그것은 변화되거나 탈선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상처를 주고자 하는 그 말들이 자신들의 기호를 상실하며 의도된 것과 반대되는 어떤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이런 혐오 발언에 대한 전복적인 재인용을 “모욕적인 발언에 대한 저항적인 전유나 재수행”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사례로 그녀는 ‘퀴어’라는 혐오 발언에 대한 재의미부여를 꼽는다.
(‘퀴어queer’와 같은 용어들에 대한 가치 전도는 말이 그 말의 발언자에게 다른 형태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원래의 목적과 반대로 인용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효과의 반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혐오 발언이 행하는 것에는 수신자를 구타하고 열등하게 못 박아 두거나 침묵시키는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저항의 도구’로 쓰일 수 있는 전복적인 재인용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혐오 발언에 대한 패러디, 혹은 랩 음악에서의 전유, 성희롱이나 성차별, 언어 폭력에 대한 증언이 그렇다.
버틀러의 견해대로 혐오 발언이 희극으로, 저항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혐오 발언에 저항하라
혐오 발언의 효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마리 마츠다, 캐서린 매키넌, 레이 랭턴 등은 혐오 발언자는 권력을 가진 자이고, 혐오 발언의 수신 집단은 권력이 없는 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혐오 발언자가 이처럼 신적인 권위를 소유하고 있는 자는 아니라고 한다. 버틀러는 푸코의 권력 이론을 끌어와 권력은 주체나 주체의 의도, 혹은 국가 권력과 같은 주권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중심들로 분산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혐오 발언자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이지 않다. 혐오 발언자는 혐오 발언을 만든 저자가 아니라 담론 속에서 이를 인용하는 이차 저자일 뿐이다.
국가의 규제는 자의적이다
버틀러는 국가가 혐오 발언을 결정하는 행위자로 등장할 때 가치중립성을 지킬 것이라는 점에 회의적이다. 버틀러는 국가가 몇몇 혐오 발언에 대해서는 진술문이나 표현의 자유로 해석한 반면, 군대 내 동성애자의 발언이나 소수자들의 예술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수행문이나 외설, 도발적인 표현으로 해석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국가는 소수자 집단에 불리한 방향으로 혐오 발언 규제를 적용해 왔다고 주장한다. 즉 국가는 혐오 발언을 편파적이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할 뿐 아니라, 역으로 소수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규제를 강화한다고 우려한다.
국가가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
무엇이 혐오 발언인지 아닌지를 국가가 자의적이고 편파적으로 해석하고 결정한다면, 이는 국가가 혐오 발언을 정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 다른 수행적인 언어행위가 된다. 버틀러는 국가가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문제 해결에서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는 공식을 제안하고자 하는데, 내 생각에는 심지어 과장법이기조차 한 그 공식이 혐오 발언 규제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공식은 이렇다. 즉, 그리고 나는 이를 통해 국가가 다양한 비방, 별명, 그리고 현재 국민 사이에 유통되는 형태의 욕설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범주는 국가의 비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국가의 사법적 언어의 권력은 국가가 그런 결정에 있어서 제한하는 기능 이상으로 행위함을 나타내는 것을 단지 의미할 뿐이다. 국가는 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발언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생산한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선을 표시함으로써, 그리고 그 결과 경계선을 구성하며 존속시키는 권력을 보유함으로써 말이다.
이처럼 혐오 발언을 국가와 법에 맡기려는 “규제 노력들은 공적으로 보호를 받는 표현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표현 간의 구분을 강제하는 국가의 강화된 권력에 의해 불가피하게 강화”된다. 그러나 버틀러가 보기에 “국가의 이러한 담론 생산 기능의 행사는 혐오 발언 규제를 지지하는 저술들 속에서는 과소평가된다. 그들은 법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가변적이라는 견해를 지지하여 법에 의한 오용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국가가 “어떤 형태의 상처가 되는 표현을 자신 스스로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권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법적 언어의 정치적인 중립성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버틀러는 우리가 “우리가 그러한 발언을 규제하려고 국가에 의지하고자 할 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특히 그런 호소를 통해 강화되는 국가의 규제 권력은 어떤 것인가? (……) 내가 염려하는 것은 (……) 법적 보상의 과정을 통해 국가에 양도된 고유한 담론 권력이다”라는 우려를 보인다. 따라서 그녀는 “혐오적인 발언의 의례적인 연쇄는 검열 수단에 의해서는 효과적으로 저항될 수 없다고 정말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규제적이고 사법적이지 않은 혐오 발언에 저항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버틀러는 “재전유의 작업이 보호받는 공적 담론 영역 내에서 착수된다면 그때의 결과는 표현의 상처를 결정하는 작업이 법에게 양도될 때보다 좀 더 희망적이고 민주적인 듯”하다고 주장한다. 즉 “표현과 행위의 간극을 주장하는 것은 비사법적인 형태의 저항, 즉 법원에서 결정된 것들을 초월하는 맥락 속에서 표현을 재수행하고 재의미부여하는 방식을 지지하는 것”이다. 국가 중심적이지 않은 저항 방안은 무엇일까? 혐오 발언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혐오 발언에 저항할 수 있을까?
법적 규제를 거부하는 버틀러는 혐오 언어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침묵 속에서 말하기’와 ‘가치 전도’ 그리고 ‘되받아쳐 말하기’를 제시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상처를 주는 언어 행위와 그로 인해 생긴 상처 사이에는 어떤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이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이 간격에서 발언자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되받아쳐 말하거나 발언을 전도함으로써 발언자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 간격은 또한 발언자의 의도를 벗어나 예기치 않은 전복을 가능하게 한다. 버틀러는 퀴어queer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 발언 사이의 간격에서 반복과 재의미부여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기존 권력이 부재했던 자들도 과거의 맥락과 단절하여 새로운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침묵 속에서도 말할 수 있을까?
버틀러는 질문한다. “사기꾼과 진정한 권위를 구별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는가? 그리고 발언이 둘 사이의 모호함을 강요하는 순간들, 거기에서 발언이 기존의 정당성의 근거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들, 발언이 발언 그 자체의 효과로서 정당성의 측면에서 어떤 변화를 수행적으로 낳는 순간이 있는가?” 언어의 “인용적 구조는 수행문으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 맥락과 단절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 행위와 상처 간에는 저항의 장소로 활용될 수 있는 잠재적 간격gap이 존재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되받아쳐 말하기talking back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혐오 발언의 청자(혹은 피해자)는 이렇게 언어와 효과 사이의 간극을 활용하여 발언자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되받아쳐서 말하거나, 수행문이 도용과 기생에 취약하다는 점을 활용해서 반박할 수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언어 행위는 육체적인 행위로서 발언자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이러한 언어와 효과 사이의 간격은 발언자의 의도를 벗어나 예기치 않은 전복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버틀러는 발언효과행위(언어 행위가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언어 행위)로서의 언어 행위는 오히려 기존 사회적 권력 관계를 뒤흔들도록 작용할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어떤 “언어 행위가 과거의 맥락을 재의미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부분적으로, 어떤 발언이 발생된 원래의 맥락 혹은 의도와 그것이 낳은 효과 사이의 간격에 달려 있다.” 수행문은 “단순히 과거의 사회적 조건들을 반영할 뿐 아니라 일련의 사회적인 효과들을 생산하며, (……) 수행적인 담론의 효과는 자신이 출현한 권위적인 맥락들을 초월하고 맥락들을 교란”시킨다. 그처럼 “행위와 상처의 연결을 풀어 놓는 것은, 그런 연결을 단단하게 함으로써 배제될 수 있는 저항 발언counter-speech, 즉 일종의 되받아쳐 말하기talking back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 둔다.” 발언의 사례 사이의 간격은 그 발언의 반복과 재의미부여를 가능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말이 어떻게 시간을 거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자신의 권력으로부터 분리되어 더욱 긍정적인 양태들로 재맥락화recontexualize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어떤 “수행문의 힘은 관습적인 공식을 비관습적인 방식으로 되풀이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수신자는 예측 불가능하거나 ‘기생적인’ 방식으로 언어의 힘에 대응할 수 있다. 만일 혐오 발언의 발언내행위력이 관습적 행위라는 것을 암시한다면, 그와 같은 말에 대한 대응은 비관습적으로 행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침묵당하거나 수치당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혐오 발언은 물론 “건네받은 자를 침묵시키고자 하는 행위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침묵당한 자의 어휘 내에서 예상치 못한 응수로서 회복될 수 있는 것”이 된다. 혐오 발언은 “강렬한 수치심과 공적 공간을 파괴하지만, 아마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수치심이 누군가의 이의를 통해 치워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혐오 발언은 그 용어에 대한 공격적인 재전유, 혹은 담론적 저항을 통해 이의를 제기받을 수 있다.” 따라서 “호명되는 것은, 비록 들어맞지 않는 방식으로 호명된다 하더라도, 주체로 하여금 그들이 존재로 불리우게 된 근거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종속적인 지위를 확고히 하도록 역사적으로 작동했던 낙인들을 잠재적으로 되찾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혐오 발언의 양가성
우리는 어째서 언어에 상처를 받는 걸까? 혐오 발언을 주로 오스틴적인 발언내행위로 간주하여 규제를 지지하는 자들은, 상처를 주는 발언의 발언되고 발언될 수 있으며 명시적인 언어의 부분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어떤 말이 상처를 주는가, 어떤 표현물들이 모욕을 주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버틀러가 보기에 “그럼에도 언어적인 상처란 누군가에게 전달된 말뿐 아니라 전달되는 방식 그 자체, 즉 주체를 호명하고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기질이나 관습적인 태도―의 효과”이다. 우리는 타인의 호명을 통해 ‘사회적 존재’가 된다. 즉 “말을 전달받은 것은 이미 누군가인 무언가가 단지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인정이 가능해지는 그 용어들을 부여받은 것을 뜻한다. 주체는 이러한 대타자의 말 걸기에 대한 근본적인 의존성으로 ‘존재’하게 된다. 주체는 인정됨뿐 아니라 어떤 선험적인 의미에서 인정될 수 있음으로 인해 ‘존재’한다.” 따라서 버틀러는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언어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즉 존재하기 위해 언어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언어가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까? 우리가 언어에 취약하다는 것은 우리가 언어의 용어들 내에서 구성된 그 결과는 아닐까?”라고 묻는다.
혐오 발언은 “언어에 대한 어떤 선험적인 취약함을, 즉 무언가가 되기 위해 대타자의 말 걸기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가 호명됨으로써 일종의 존재를 갖게 되는 취약함을 노출”시킨다. 우리가 타인의 호명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그것이 혐오 발언이든 아니든 타인의 호명에 취약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이나 혐오 발언자보다는 그 혐오 발언의 호명으로 인해 탄생되는 주체에 관심을 둔다. 그녀에 따르면 “언어는 몸을 존속시킨다.” 언어는 주체의 죽음뿐 아니라 생존 역시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이를 “언어적 생존”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언어적 생존linguistic survival’은 특정한 종류의 생존은 언어 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모욕적인 부름은 “그 모욕적인 부름에 반박하고자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어떤 주체를 언어 속에 도입하는 위험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상처가 되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폄하되고 비하된다. 그러나 그 이름은 또한 또 다른 가능성을 보인다. 다시 말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림으로써 그에게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존재existence가 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주어지게 되고, 또한 그는 그 부름을 발생시킨 과거의 목적을 초월하는 언어의 새로운 시간적 삶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상처를 주는 말의 전달은 그것이 호명한 사람을 고정시키거나 마비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예상 밖의 가능성을 여는 응답을 낳을 수” 있다. 비록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상처의 장소가 될 수 있”지만, 이러한 “이름 부르기는 저항 운동을 개시하는 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버틀러는 이로써 혐오 발언이 피해자들을 침묵시키고 불구로 만든다는 발언내행위론에 반대하여 발언효과행위론을 제시한다. 혐오 발언이 “‘피해자 계급’을 생산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비판적 행위능력을 부정하고 행위능력이 전적으로 국가에 맡겨지는 개입을 지지”한다. 그러나 만일 “만일 상처를 주는 말의 수행성이 발언효과행위로 여겨진다면, 그런 말은 일련의 필연적이지 않은 효과들을 생산하는 정도까지만 자신의 고통을 주는 효과를 작동시키게 된다. 그 발언으로부터 다른 효과들이 따라 나올 수 있어야만 그런 발언에 대한 전유하기appropriating, 전복시키기reversing, 재맥락화하기recontextualizing가 가능해진다. 일부 법적 접근들이 혐오 발언에 대해 발언내행위적인 지위(언어가 상처가 되는 효과의 직접적이고 필연적인 행사이다)를 가정하는 한, 저항 발언counter-speech을 통해 그런 말의 권력을 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배제”된다. 그런 전략은 혐오 발언이 비판적 대응을 위해 요청되는 수행성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언한다.
이는 혐오 발언이 피해자들을 꼭 파괴하거나 침묵시키고 종속시키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혐오 발언은 양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불리는 이름은 우리를 종속시키기도 하지만 행위능력의 장면을 양가성으로부터 생산함으로써 그 부름이 발생한 의도를 초월하는 일련의 효과들을 또한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불리는 이름을 떠맡는 것은 과거의 권위에 대한 단순한 종속이 아니다. 그 이름은 이미 과거의 맥락에서 이탈해 자기 정의의 노력으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처를 주는 말은 그것이 작동했던 과거의 영토를 파괴하는 재사용 속에서 저항의 도구”가 된다. 그런 “재사용은 과거의 권위가 없는 말을 하는 것을, 언어적인 삶의 안전에 대한 위험으로 들어가는 것을, 언어 속의 우리의 장소에 대한 감각을, 우리가 말하는 대로 우리의 말이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위험은 상처를 주는 언어가 그 말을 건네받은 자의 언어적인 생존에 질문을 던질 때 그 언어와 함께 이미 도착한 것이다. 반항적인 말은 상처를 주는 언어에 대한 불가피한 반응, 위험에 처해진 것에 대응하여 취해진 위험, 변화를 행하게 만드는 언어 내에서의 반복”이 된다. 따라서 버틀러는 침묵 속에서도 말할 수 있다고, 혐오 발언에 대한 저항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호미 바바, 시카고 대학
표현의 자유의 정치에 관련되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저서다.
―드루실라 코넬, 러트거즈 대학 법대
우리에게 정치가 진지한 사유를 필요로 함을 보여주는 훌륭한 참여다.
―조나단 쿨러, 코넬 대학
이 훌륭한 저서에서 느슨한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다.
―바버라 존슨, 하버드 대학
혐오 발언에 대한 저항은 가능한가?
1990년대 미국 사회에서는 인종차별, 성적 소수자 차별, 혐오 범죄가 특히 부각되었다. 백인 소년이 흑인 가족의 집 마당에서 십자가를 태운 사건, 고등법원장 후보가 한때 부하 직원인 판사를 성적으로 추행하여 상원의원 청문회까지 열렸던 일, 영화 <미시시피 버닝>을 보고 난 후 백인을 살해한 흑인들, 로드니 킹, 동성애 차별 등이 끊이질 않았다.
2010년대 한국 사회의 흐름도 이와 비슷하다. 일베, 김치녀, 소라넷, 강남역 살인 사건, 여성 혐오 랩 가사, 퀴어문화축제, 고위 공직자의 ‘개돼지’ 발언, 데이트 폭력, 메갈리아……. 그야말로 혐오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혐오 발언’의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했다.
흔히 ‘막말’이라고 하는 사태는 최근 교육부 고위 공직자의 ‘개, 돼지’ 발언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개인적 일탈 행위였다 쳐도, 그의 말은 ‘듣는 이의 따귀를 강타하고, 복부를 걷어차고, 열등한 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 책 『혐오 발언』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국가가 혐오 발언을 생산한”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의 논쟁적인 책 『혐오 발언』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사라 살리), “낸시 프레이저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며 토론되는 철학자 중 한 명”(리처드 로티)으로 소개되곤 하는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수행성, 패러디, 드래그 등의 개념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이 책 『혐오 발언』에서 ‘상처를 주는 말’ 즉 혐오 발언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더 세부적으로는,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 규제의 문제, 검열과 표현의 자유 문제, 언어적인 상처, 타인의 호명으로 탄생하는 주체의 문제, 언어적 생존이나 화자의 책임 등과 같은 언어와 권력, 침묵이나 전유 그리고 저항에 관한 심층적이고 본질적인 철학적 질문 들이다. 따라서 『혐오 발언』에서 버틀러가 던지는 이런 질문들은 시공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한국 사회의 ‘상처를 주는 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도 동시대성이 존재하며 많은 사유들을 제공해 줄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 책 『혐오 발언』에서 혐오 발언, 포르노그래피, 동성애자의 자기 선언, 십자가 소각, 국가 검열 문제 등 다양한 형태의 ‘상처를 주는 말’을 다룬다. 그녀는 포르노그래피와 인종차별주의가 법적 규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몇몇 페미니스트들과 반인종차별주의 이론가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이끌어낸다. 그녀가 비판하는 이론가들은 모두 혐오 발언을 규제하자는 어떤 ‘평등’주의적 논증을 제기한다. 즉 발언이 집단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버틀러는 이런 논증들을 거부한다. 궁극적으로 그녀는 혐오 발언에 대한 어떤 규제도 제정하지 말 것을 권한다. 규제는 “발언을 ‘재의미부여’하고 ‘재수행’함으로써 이런 발언에 도전하도록 일깨워질 자들을 침묵시키도록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가 비판하는 이들은 모두 ‘상처를 주는 말’에 대해, 이는 주체가 의도적으로 행사하는 차별 행위이고, 이 말들은 곧 행위가 되며 수신자를 열등한 지위로 종속시킨다는 견해를 편다. 그들은 혐오 발언이나 포르노그래피가 ‘그냥 말only words’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혐오 발언을 폭력이자 차별 행위로 간주한다.
버틀러는 어째서 이런 이론가들을 비판하는 것일까? 그녀는 혐오 발언의 이런 해악들을 부정하는 것인가?
혐오 발언을 어떻게 사유해야 할까?
많은 언어학자와 페미니스트 이론가, 인종이론 연구자는 혐오 언어는 그 자체로 폭력적 혐오 행위이며, 차별적 행위라며 법률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마리 마츠다는 규제나 처벌을 받지 않는 혐오 발언자는 국가 권위의 후원을 받는 것이며, 혐오 언어의 피해자는 국가가 없는 자가 된다. 그녀는 KKK단과 네오 나치의 사례를 들며 혐오 집단의 위협은 불법적인 폭력 행위 이상이며, 그들의 인종차별적 선동은 개인의 안전과 자유를 부정하는 행위라고 본다. 따라서 이들의 혐오 발언을 방치하는 것은 사실상 그것을 지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방치는 다수자에게 소수자를 억압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가 승인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공식적인 처벌과 제제는 혐오 발언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 언어에 대한 반대는 분명하게 밝히면서도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의 규제에는 반대한다. 그녀는 ‘혐오 발언’을 법적으로 규제하자는 주장하는 몇몇 페미니스트 및 반인종차별주의 이론가들과 논쟁을 벌였다.
혐오 발언은, 말만 가지고도 사회적 약자들을 예속시키는가? 포르노그래피는 여성들을 열등한 지위로 못 박아 두는가?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청자를 모욕하는 성행위인가? 버틀러는 이 책 『혐오 발언』에서 이런 견해부터 따진다. 과연 언어는 화자가 의도한 대로 타인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한 것인가? 버틀러는 이들처럼 언어가 의도한 대로 행위가 되고, 혐오 발언이나 포르노그래피가 주체를 열등한 지위로 재종속시킨다는 견해를 발언내행위론이라 지칭하여 비판한다.
그녀가 혐오 발언의 절대적 효력을 의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혐오 발언은 어쨌든 피해자에게 막대한 해악을 끼친다. 그런데, 혐오 발언은 항상 작동할까? 혐오 발언은 항상 기계적이고 정확하게 효과를 낳을까? 버틀러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버틀러 역시 혐오 발언이 어떻게 행위하고, 심지어 상처를 주게끔 행위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혐오 발언 규제의 지지자들이 기술하는 꼭 그런 방식으로 언어가 직접적이거나 인과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기에 버틀러는 혐오 발언의 규제 지지자에 대한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견해를 제공하고자 한다.
버틀러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이 주체를 구성한다는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에 대한 비판을 전개한다. 버틀러는 호명의 작동은 필연적일 수 있지만, 기계적이거나 전적으로 예측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권력은 그 권력이 행사되는 효력과는 구별된다. 오히려 권력은 일부 언어 행위 이론이 나타내는 것처럼 그렇게 식별하거나 국한하기 쉽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녀는 J.L. 오스틴과 쇼사나 펠만의 이론에 의지하여, “말의 기계적인 고장이나 ‘불발’ 그리고 예측 불가능성”(오스틴)을 재강조하고, 언어 행위는 말하는 몸의 행위로 무엇보다 육체적인 행위(쇼사나 펠만)라는 점을 재인용한다. 그리하여 버틀러는 말의 육체적인 효과는 화자의 의도를 초월한다고 설명한다. 버틀러는 이렇게 발언과 행위, 발언과 효과 사이의 ‘간격’을 주장하는, 혐오 발언에 대한 ‘발언효과행위론’을 펼친다. 버틀러에 따르면 “말하기가 그 자체로 행하기인 것은 아니며, 그것은 저항되어야만 하는 피해의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말함과 행함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비록 어렵다 하더라도 발언이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피해를 행하는지 말할 수 있는 어떤 이야기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혐오 발언은 다른 의미나 힘, 효과를 가질 수 없는가?
이처럼 언어 행위가 반드시 의도한 대로 행위하지 못한다는 특성은 혐오 발언의 효력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뜻한다. 또한 반면에 혐오 발언이 전유와 전복에 취약함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버틀러는 “만일 우리가 언명된다고 할 수 있는 ‘구조’의 시간적인 생명을 고려하게 된다면, 혐오 발언의 언어 행위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한 것으로, 즉 혁신과 전복을 당하기 좀 더 쉬운 것으로 인식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질문한다.
혐오 발언 규제 옹호론자인 리처드 델가도에 따르면, ‘껌둥이nigger’와 ‘스페인놈spick’과 같은 혐오 발언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쓰일 때조차 비하의 낙인이다. 그러나 버틀러는 “그럼에도 바로 이 진술은, 그의 텍스트에서 쓰였든 여기에서 인용되었든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그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그 낱말을 방금 사용했다. (……) 그런 말들이 다른 의미들을 내포할 수 없다고 귀결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혐오 발언은 이처럼 맥락 이탈과 인용에 취약한 탈-인용 가능한 발언ex-citable인 것이다. 버틀러는 발언들은 항상 같을 수는 없으며, 그것은 변화되거나 탈선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상처를 주고자 하는 그 말들이 자신들의 기호를 상실하며 의도된 것과 반대되는 어떤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는 이런 혐오 발언에 대한 전복적인 재인용을 “모욕적인 발언에 대한 저항적인 전유나 재수행”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사례로 그녀는 ‘퀴어’라는 혐오 발언에 대한 재의미부여를 꼽는다.
(‘퀴어queer’와 같은 용어들에 대한 가치 전도는 말이 그 말의 발언자에게 다른 형태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원래의 목적과 반대로 인용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효과의 반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혐오 발언이 행하는 것에는 수신자를 구타하고 열등하게 못 박아 두거나 침묵시키는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저항의 도구’로 쓰일 수 있는 전복적인 재인용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혐오 발언에 대한 패러디, 혹은 랩 음악에서의 전유, 성희롱이나 성차별, 언어 폭력에 대한 증언이 그렇다.
버틀러의 견해대로 혐오 발언이 희극으로, 저항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혐오 발언에 저항하라
혐오 발언의 효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마리 마츠다, 캐서린 매키넌, 레이 랭턴 등은 혐오 발언자는 권력을 가진 자이고, 혐오 발언의 수신 집단은 권력이 없는 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혐오 발언자가 이처럼 신적인 권위를 소유하고 있는 자는 아니라고 한다. 버틀러는 푸코의 권력 이론을 끌어와 권력은 주체나 주체의 의도, 혹은 국가 권력과 같은 주권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중심들로 분산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혐오 발언자의 권력은 절대적이고 독립적이지 않다. 혐오 발언자는 혐오 발언을 만든 저자가 아니라 담론 속에서 이를 인용하는 이차 저자일 뿐이다.
국가의 규제는 자의적이다
버틀러는 국가가 혐오 발언을 결정하는 행위자로 등장할 때 가치중립성을 지킬 것이라는 점에 회의적이다. 버틀러는 국가가 몇몇 혐오 발언에 대해서는 진술문이나 표현의 자유로 해석한 반면, 군대 내 동성애자의 발언이나 소수자들의 예술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수행문이나 외설, 도발적인 표현으로 해석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국가는 소수자 집단에 불리한 방향으로 혐오 발언 규제를 적용해 왔다고 주장한다. 즉 국가는 혐오 발언을 편파적이거나 자의적으로 해석할 뿐 아니라, 역으로 소수자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규제를 강화한다고 우려한다.
국가가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
무엇이 혐오 발언인지 아닌지를 국가가 자의적이고 편파적으로 해석하고 결정한다면, 이는 국가가 혐오 발언을 정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 다른 수행적인 언어행위가 된다. 버틀러는 국가가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문제 해결에서 역설적으로 보일 수 있는 공식을 제안하고자 하는데, 내 생각에는 심지어 과장법이기조차 한 그 공식이 혐오 발언 규제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공식은 이렇다. 즉, 그리고 나는 이를 통해 국가가 다양한 비방, 별명, 그리고 현재 국민 사이에 유통되는 형태의 욕설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 범주는 국가의 비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의 영역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국가의 사법적 언어의 권력은 국가가 그런 결정에 있어서 제한하는 기능 이상으로 행위함을 나타내는 것을 단지 의미할 뿐이다. 국가는 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발언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생산한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선을 표시함으로써, 그리고 그 결과 경계선을 구성하며 존속시키는 권력을 보유함으로써 말이다.
이처럼 혐오 발언을 국가와 법에 맡기려는 “규제 노력들은 공적으로 보호를 받는 표현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표현 간의 구분을 강제하는 국가의 강화된 권력에 의해 불가피하게 강화”된다. 그러나 버틀러가 보기에 “국가의 이러한 담론 생산 기능의 행사는 혐오 발언 규제를 지지하는 저술들 속에서는 과소평가된다. 그들은 법이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가변적이라는 견해를 지지하여 법에 의한 오용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국가가 “어떤 형태의 상처가 되는 표현을 자신 스스로 만들어내고 유지시키는 권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법적 언어의 정치적인 중립성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버틀러는 우리가 “우리가 그러한 발언을 규제하려고 국가에 의지하고자 할 때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특히 그런 호소를 통해 강화되는 국가의 규제 권력은 어떤 것인가? (……) 내가 염려하는 것은 (……) 법적 보상의 과정을 통해 국가에 양도된 고유한 담론 권력이다”라는 우려를 보인다. 따라서 그녀는 “혐오적인 발언의 의례적인 연쇄는 검열 수단에 의해서는 효과적으로 저항될 수 없다고 정말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규제적이고 사법적이지 않은 혐오 발언에 저항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버틀러는 “재전유의 작업이 보호받는 공적 담론 영역 내에서 착수된다면 그때의 결과는 표현의 상처를 결정하는 작업이 법에게 양도될 때보다 좀 더 희망적이고 민주적인 듯”하다고 주장한다. 즉 “표현과 행위의 간극을 주장하는 것은 비사법적인 형태의 저항, 즉 법원에서 결정된 것들을 초월하는 맥락 속에서 표현을 재수행하고 재의미부여하는 방식을 지지하는 것”이다. 국가 중심적이지 않은 저항 방안은 무엇일까? 혐오 발언에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혐오 발언에 저항할 수 있을까?
법적 규제를 거부하는 버틀러는 혐오 언어에 저항하는 방법으로 ‘침묵 속에서 말하기’와 ‘가치 전도’ 그리고 ‘되받아쳐 말하기’를 제시한다. 버틀러에 따르면 상처를 주는 언어 행위와 그로 인해 생긴 상처 사이에는 어떤 간격이 존재한다. 이 간격이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이 간격에서 발언자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되받아쳐 말하거나 발언을 전도함으로써 발언자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 간격은 또한 발언자의 의도를 벗어나 예기치 않은 전복을 가능하게 한다. 버틀러는 퀴어queer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 발언 사이의 간격에서 반복과 재의미부여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기존 권력이 부재했던 자들도 과거의 맥락과 단절하여 새로운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침묵 속에서도 말할 수 있을까?
버틀러는 질문한다. “사기꾼과 진정한 권위를 구별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는가? 그리고 발언이 둘 사이의 모호함을 강요하는 순간들, 거기에서 발언이 기존의 정당성의 근거에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들, 발언이 발언 그 자체의 효과로서 정당성의 측면에서 어떤 변화를 수행적으로 낳는 순간이 있는가?” 언어의 “인용적 구조는 수행문으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 맥락과 단절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 행위와 상처 간에는 저항의 장소로 활용될 수 있는 잠재적 간격gap이 존재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되받아쳐 말하기talking back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혐오 발언의 청자(혹은 피해자)는 이렇게 언어와 효과 사이의 간극을 활용하여 발언자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되받아쳐서 말하거나, 수행문이 도용과 기생에 취약하다는 점을 활용해서 반박할 수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언어 행위는 육체적인 행위로서 발언자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이러한 언어와 효과 사이의 간격은 발언자의 의도를 벗어나 예기치 않은 전복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버틀러는 발언효과행위(언어 행위가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낳을 수 있는 언어 행위)로서의 언어 행위는 오히려 기존 사회적 권력 관계를 뒤흔들도록 작용할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어떤 “언어 행위가 과거의 맥락을 재의미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부분적으로, 어떤 발언이 발생된 원래의 맥락 혹은 의도와 그것이 낳은 효과 사이의 간격에 달려 있다.” 수행문은 “단순히 과거의 사회적 조건들을 반영할 뿐 아니라 일련의 사회적인 효과들을 생산하며, (……) 수행적인 담론의 효과는 자신이 출현한 권위적인 맥락들을 초월하고 맥락들을 교란”시킨다. 그처럼 “행위와 상처의 연결을 풀어 놓는 것은, 그런 연결을 단단하게 함으로써 배제될 수 있는 저항 발언counter-speech, 즉 일종의 되받아쳐 말하기talking back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 둔다.” 발언의 사례 사이의 간격은 그 발언의 반복과 재의미부여를 가능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말이 어떻게 시간을 거쳐서 상처를 줄 수 있는 자신의 권력으로부터 분리되어 더욱 긍정적인 양태들로 재맥락화recontexualize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어떤 “수행문의 힘은 관습적인 공식을 비관습적인 방식으로 되풀이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수신자는 예측 불가능하거나 ‘기생적인’ 방식으로 언어의 힘에 대응할 수 있다. 만일 혐오 발언의 발언내행위력이 관습적 행위라는 것을 암시한다면, 그와 같은 말에 대한 대응은 비관습적으로 행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침묵당하거나 수치당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혐오 발언은 물론 “건네받은 자를 침묵시키고자 하는 행위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침묵당한 자의 어휘 내에서 예상치 못한 응수로서 회복될 수 있는 것”이 된다. 혐오 발언은 “강렬한 수치심과 공적 공간을 파괴하지만, 아마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수치심이 누군가의 이의를 통해 치워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혐오 발언은 그 용어에 대한 공격적인 재전유, 혹은 담론적 저항을 통해 이의를 제기받을 수 있다.” 따라서 “호명되는 것은, 비록 들어맞지 않는 방식으로 호명된다 하더라도, 주체로 하여금 그들이 존재로 불리우게 된 근거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종속적인 지위를 확고히 하도록 역사적으로 작동했던 낙인들을 잠재적으로 되찾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혐오 발언의 양가성
우리는 어째서 언어에 상처를 받는 걸까? 혐오 발언을 주로 오스틴적인 발언내행위로 간주하여 규제를 지지하는 자들은, 상처를 주는 발언의 발언되고 발언될 수 있으며 명시적인 언어의 부분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어떤 말이 상처를 주는가, 어떤 표현물들이 모욕을 주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버틀러가 보기에 “그럼에도 언어적인 상처란 누군가에게 전달된 말뿐 아니라 전달되는 방식 그 자체, 즉 주체를 호명하고 주체를 구성하는 방식―기질이나 관습적인 태도―의 효과”이다. 우리는 타인의 호명을 통해 ‘사회적 존재’가 된다. 즉 “말을 전달받은 것은 이미 누군가인 무언가가 단지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인정이 가능해지는 그 용어들을 부여받은 것을 뜻한다. 주체는 이러한 대타자의 말 걸기에 대한 근본적인 의존성으로 ‘존재’하게 된다. 주체는 인정됨뿐 아니라 어떤 선험적인 의미에서 인정될 수 있음으로 인해 ‘존재’한다.” 따라서 버틀러는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언어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즉 존재하기 위해 언어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언어가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까? 우리가 언어에 취약하다는 것은 우리가 언어의 용어들 내에서 구성된 그 결과는 아닐까?”라고 묻는다.
혐오 발언은 “언어에 대한 어떤 선험적인 취약함을, 즉 무언가가 되기 위해 대타자의 말 걸기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가 호명됨으로써 일종의 존재를 갖게 되는 취약함을 노출”시킨다. 우리가 타인의 호명에 의존하고 있는 이상, 그것이 혐오 발언이든 아니든 타인의 호명에 취약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이나 혐오 발언자보다는 그 혐오 발언의 호명으로 인해 탄생되는 주체에 관심을 둔다. 그녀에 따르면 “언어는 몸을 존속시킨다.” 언어는 주체의 죽음뿐 아니라 생존 역시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이를 “언어적 생존”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언어적 생존linguistic survival’은 특정한 종류의 생존은 언어 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모욕적인 부름은 “그 모욕적인 부름에 반박하고자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 어떤 주체를 언어 속에 도입하는 위험을 감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상처가 되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폄하되고 비하된다. 그러나 그 이름은 또한 또 다른 가능성을 보인다. 다시 말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림으로써 그에게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존재existence가 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주어지게 되고, 또한 그는 그 부름을 발생시킨 과거의 목적을 초월하는 언어의 새로운 시간적 삶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상처를 주는 말의 전달은 그것이 호명한 사람을 고정시키거나 마비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예상 밖의 가능성을 여는 응답을 낳을 수” 있다. 비록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상처의 장소가 될 수 있”지만, 이러한 “이름 부르기는 저항 운동을 개시하는 순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버틀러는 이로써 혐오 발언이 피해자들을 침묵시키고 불구로 만든다는 발언내행위론에 반대하여 발언효과행위론을 제시한다. 혐오 발언이 “‘피해자 계급’을 생산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비판적 행위능력을 부정하고 행위능력이 전적으로 국가에 맡겨지는 개입을 지지”한다. 그러나 만일 “만일 상처를 주는 말의 수행성이 발언효과행위로 여겨진다면, 그런 말은 일련의 필연적이지 않은 효과들을 생산하는 정도까지만 자신의 고통을 주는 효과를 작동시키게 된다. 그 발언으로부터 다른 효과들이 따라 나올 수 있어야만 그런 발언에 대한 전유하기appropriating, 전복시키기reversing, 재맥락화하기recontextualizing가 가능해진다. 일부 법적 접근들이 혐오 발언에 대해 발언내행위적인 지위(언어가 상처가 되는 효과의 직접적이고 필연적인 행사이다)를 가정하는 한, 저항 발언counter-speech을 통해 그런 말의 권력을 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배제”된다. 그런 전략은 혐오 발언이 비판적 대응을 위해 요청되는 수행성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을 단언한다.
이는 혐오 발언이 피해자들을 꼭 파괴하거나 침묵시키고 종속시키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혐오 발언은 양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불리는 이름은 우리를 종속시키기도 하지만 행위능력의 장면을 양가성으로부터 생산함으로써 그 부름이 발생한 의도를 초월하는 일련의 효과들을 또한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불리는 이름을 떠맡는 것은 과거의 권위에 대한 단순한 종속이 아니다. 그 이름은 이미 과거의 맥락에서 이탈해 자기 정의의 노력으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처를 주는 말은 그것이 작동했던 과거의 영토를 파괴하는 재사용 속에서 저항의 도구”가 된다. 그런 “재사용은 과거의 권위가 없는 말을 하는 것을, 언어적인 삶의 안전에 대한 위험으로 들어가는 것을, 언어 속의 우리의 장소에 대한 감각을, 우리가 말하는 대로 우리의 말이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위험은 상처를 주는 언어가 그 말을 건네받은 자의 언어적인 생존에 질문을 던질 때 그 언어와 함께 이미 도착한 것이다. 반항적인 말은 상처를 주는 언어에 대한 불가피한 반응, 위험에 처해진 것에 대응하여 취해진 위험, 변화를 행하게 만드는 언어 내에서의 반복”이 된다. 따라서 버틀러는 침묵 속에서도 말할 수 있다고, 혐오 발언에 대한 저항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목차
감사의 글
서장. 우리는 왜 언어에 상처를 받는 걸까
1. 불태우는 행위, 고통을 주는 말
2. 주권적 수행문
3. 전염적인 말: 편집증과 군대 내 동성애
4. 은폐된 검열과 담론적 수행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