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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 00025900 | 대출가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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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베블런은 누구인가
19세기 미국사회와 경제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자만심을 뒤흔든 독창적 경제학자. 베블런은 1857년 위스콘신 주 카토 부근의 한 개척농가에서 태어났다. 1880년 칼턴 칼리지를 졸업한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했지만 예일 대학교에서 1884년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가족이 사는 농촌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작업을 했다. 베블런은 1892년이 되어서야 시카고 대학교의 전임강사직을 얻을 수 있었다. 1899년 그는 첫 번째 저서이자 최고의 역작인 <유한계급론>이 출간되자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책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두 가지의 교리적 진리, 즉 ① 자본가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일치한다. ② 경쟁체계는 경제를 진보시키는역동성을 제공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학술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모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책은 경제이론 뿐 아니라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기업론>(1904)을 통해 미국의 기업제도에 이단적이라고 할 만한 직격탄을 날리고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 유명세 덕분에 한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하며 마르크스의 체계는 지속력도 없고 사고력도 부족하다고 단언했다. 베블런은 미주리 주립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집필에 더욱 열중해 <제작본능과 산업기술의 실태>(1911) <독일 제국과 산업혁명>(1915) <평화의 본질과 그 존속 기간에 대한 연구>(1917) <미국의 고등교육>(1918) 등을 펴냈다. 그는 사망하기 전 10여 년간을 뉴욕에서 진보적인 ‘새로운 사회연구소’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는 <기득권과 산업기술의 현황>(1919) <소유권 부재와 근대의 기업>(1923) 등이 있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아이슬란드 전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락스다엘라 사가>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예견했던 대공황이 엄습하기 얼마 전인 1929년 8월 3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근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저서 <변화하는 우리의 질서에 관한 단상들>은 그가 죽은 뒤 1934년에 출간되었다. 독자들은 늘 그를 정치적 급진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비관주의자였다.
왜 <유한계급론>은 여전히 스테디셀러인가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왜 그럴까? 사회철학자 루이스 멈퍼드는 “베블런은 우리의 경제질서에 내재한 사회적 모순을 마르크스 이후 가장 선구적으로 분석한 학자였다”고 회고하면서 “그의 저서들은 실로 막대사탕 포장지에 감싸인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인격을 반영하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뉴딜정책을 주창한 경제학자 스튜어트 체이스는 “베블런은 미래세대가 나아갈 궤도를 그려보인 천문학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의 초입에서 그는 “사실들을 수집하고 경제사적으로 가장 대담한 해석을 통해서 종합하여 향후 수십 년간 적용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한 이론적 틀을 제시함으로써 역사를 예견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의 시대에나 그 이후에도 금전 자체가 아닌 금전을 획득하려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행동방식을 그처럼 냉철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꿰뚫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베블런은 부자들이 나머지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한, 그리하여 과거와 다를 바 없는 미래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지속적으로 읽힐 책 한 권을 써냈다고 평가된다.
과시적 소비, 과시적 낭비, 과시적 여가
베블런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음을 남들에게 증명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돈이 자신에게 아무 소용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야만사회에서는 약탈의 능력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쉽게 대중들의 존경을 불러일으키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어서 유한계급은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를 통해 그들의 약탈능력을 드러낸다. 또한 부자가 하인들을 고용하여 그들을 생산활동에서 제외시켰다고 말하면서 그처럼 세속적인 생각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망각도리 수 있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의복의 경우, 그것은 언제나 ‘증명용’이어서 “누가 보더라도 첫눈에 우리의 금력상의 지위를 알아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에 상류계급의 의복은 몸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기능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과시적 낭비, 과시적 여가, 과시적 소비에 몰두함으로써 “다양한 가치를 지닌 고급요리들, 음료와 장신구, 그럴싸한 의상과 저택, 무기, 게임, 무용수, 흥분제 등에 관한 전문가가 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마치 미래를 내다볼 때에도 오로지 과거밖에 못 보는 자본가들과 같다. 그들이 소유한 공장들이 세계가 혁명에 휩싸여도 여전히 상품을 만들어내듯이 그들의 생활양식도 르네상스를 연상시키는 우아함을 흉내 낸다. 또한 그들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만일 노동자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체제를 붕괴시키려고 할 것을 우려해 문화적?사회적 통제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애국심, 민족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 등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과시성을 지향하는 현대사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본가계급을 타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 비해 혁명적이라기보다는 훨씬 냉소적이었던 베블런은 부자들의 자화상을 신랄하게 묘사하는 데 자신의 정열을 바쳤다. 베블런이 부자들에게 그토록 혹독한 비난을 퍼부은 까닭은 “그들의 모든 종교적 믿음과 모든 소비패턴이 바로 프로테스탄트들이 종교개혁을 위해 싸워야했던 가톨릭주의의 유습이었다”는 데 있다. 그는 실용성보다는 과시성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의 소비가 “의례”나 “성례”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소비의 특징은 “신도들의 정신구조를 확연히 고양시키고 위무”하는 “사치스럽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신성한 건축물”에서 행해지는 “경건한” 의례나 성례를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나고 또 그런 의례나 예배 속에 가장 잘 농축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가 기껏해야 이성이 아닌 감정에 호소하는 제의적인 격세유전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갈파한다.
폭력과 스포츠의 과시성
빈민들은 야만인이고 부자들은 문명인이라는 통념에 반대하는 베블런은 양측이 다 폭력에 매력을 느낀다고 지적한다. 그는 “의견차를 해소하기 위한 보편적인 방법으로 여겨지는 결투에 통상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은 오직 상류계급 신사들과 무뢰배들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결투든 거리의 싸움이든 베블런이 보기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두 가지 싸움 모두 구경꾼들의 격정에 호소하면서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명성을 확인하고 과시하려는 “발달이 억제된 남자의 도덕성”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베블런이 보기에 스포츠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그 진행방식부터 지각없는 해로운 활동이다. 베블런은 스포츠를 종교생활과 비교하면서 거듭 부자나 빈민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스포츠에 대해서 미증유의 모욕을 퍼부어다. 그는 무뢰배 내지 범법자들이나 잘 훈련받은 스포츠맨이나 모두 “공동체나 사회의 일반적인 평균인들보다 더 쉽사리 공인된 어떤 신조의 신봉자가 되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종교적인 의례에 이끌리기도 더 쉽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베블런은 자유투를 하기 전에 성호를 긋는 현대의 농구선수들이나 승리를 확신한 순간 신에게 감사기도를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여타의 현대 스포츠선수들을 보았더라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베블런이 보기에 종교와 스포츠 모두 행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전근대적인 활동이다. 그런 믿음을 가진 종교나 스포츠 옹호자들은, 예컨대, 인간에게는 신의 영광을 달성할 능력이 있다고 믿거나 미식축구의 결과도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스포츠가 사회에서 대표적인 역할을 하는 한, 즉 과시적 소비체제가 유지되는 한 스포츠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오늘날 경제적인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고대적인 생활양식’에 권좌를 내주는 것이다.
과시적 현대문화
베블런의 눈은 권위적인 대학도 피해가지 않는다. 고등교육 자체가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이미 약탈의 매력을 부추기는 활동이었다. 특유의 의례, 학사모, 가운, 배지 같은 특이한 복장을 통해 대학은 “일부 학문적 사도들을 대물림”하고 한 세대의 권위를 다음 세대에까지 세습하는 학자들로 구성된 “전문 성직자계급”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베블런이 보기에 대학은 무용한 상류계급 사람들을 유용한 사람들로 느끼게 만드는 기능을 제외하면 아무런 공적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는 “보수적”이고 심지어 “반동적”인 교육기관이다. 무엇보다도 대학교는 종교기관이었다. 베블런의 관점에서 보면 대학교들은 고전이나 인문학을 가르치고 “일반 학생들로 하여금 그런 류의 지식들을 습득하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도록” 후원하는 식의 구시대적인 관행들에 바쳐지는 “고등교육을 위한 신학교들”로 남았다고 비판한다.
베블런학파
그의 <유한계급론> 덕분에 영어권에서는 이른바 ‘베블런 학파 Veblenesque’라는 신조어가 출현했다. 지금까지 경제학계는 110여 년 전 베블런이 내놓은 저서에 필적할 만한 처방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편, 오늘날 일반 대중에게도 알려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줄리엣 쇼어, 로버트 프랭크 등 다수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베블런의 영향 아래 배출되었다. 이제 누군가를 ‘베블런 학파’라고 부르는 것은 그(그녀)가 전문 경제학자들만 빼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확연히 알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맹점을 파헤치고 폭로하는 작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한계급론>의 현대적 의미
1899년에 출간된 <유한계급론>에는 ‘기존 제도에 대한 경제적 연구’(An Economic Study of Institutions)라고 부제가 붙어 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현대의 경제생활 연구에 적용하려 했다. 그는 산업화된 제도가 사람들에게 근면, 효율, 협동을 요구하는 반면, 실제로 산업계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고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는 데에만 여념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과거에 약탈을 일삼았던 미개사회의 잔재라고 주장했다. 이 흥미로운 책은 베블런이 철저히 경제학적 분석이라고 못을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독자들 대부분이 이 내용을 경제학적 분석이라기보다는 풍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베블런은 경제학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비평가로서도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베블런이 살던 시대의 생활만큼 현대의 생활도 불공정하다. 여전히 부자들은 일류대학에 입학하고, 금력과 인맥을 등에 업고 다른 이들보다 앞서서 출세를 보장받을 수 있다. 금력과 지위를 얻은 순간, 그는 ‘과시’를 통해 자신을 증명해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유한계급이 가치 없고 값이 비싼 것일수록 과시적 소비의 품목으로 높이 치고, 값이 싸고 유용한 것일수록 천하고 품위 없는 것으로 여길수록 <유한계급론>의 분석은 가치를 더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산의 소유가 사회적 존경의 기초가 되어 자기가 속한 계층의 사람들과 경쟁적 소비를 일삼게 된다. 그 소비의 악순환에 빠지면 노동자들은 그들의 수입에 상관없이 만성적인 불만에 빠질 것이고 역으로 그들은 금전적 문화에 순응하게 될 것이다. 이 악순환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유한계급론>을 통해 여전히 자본주의 경제제도의 모순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고, 그가 풍자하려고 했던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미국사회와 경제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자만심을 뒤흔든 독창적 경제학자. 베블런은 1857년 위스콘신 주 카토 부근의 한 개척농가에서 태어났다. 1880년 칼턴 칼리지를 졸업한 그는 존스홉킨스 대학교에서 잠시 철학을 공부했지만 예일 대학교에서 1884년 정치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던 그는 가족이 사는 농촌으로 돌아와 독서와 집필작업을 했다. 베블런은 1892년이 되어서야 시카고 대학교의 전임강사직을 얻을 수 있었다. 1899년 그는 첫 번째 저서이자 최고의 역작인 <유한계급론>이 출간되자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 책은 기존의 고전경제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던 두 가지의 교리적 진리, 즉 ① 자본가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일치한다. ② 경쟁체계는 경제를 진보시키는역동성을 제공한다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학술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모을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한 세기가 지난 후 이 책은 경제이론 뿐 아니라 사회학과 역사학에서 하나의 고전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기업론>(1904)을 통해 미국의 기업제도에 이단적이라고 할 만한 직격탄을 날리고 그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 유명세 덕분에 한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의혹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하며 마르크스의 체계는 지속력도 없고 사고력도 부족하다고 단언했다. 베블런은 미주리 주립대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집필에 더욱 열중해 <제작본능과 산업기술의 실태>(1911) <독일 제국과 산업혁명>(1915) <평화의 본질과 그 존속 기간에 대한 연구>(1917) <미국의 고등교육>(1918) 등을 펴냈다. 그는 사망하기 전 10여 년간을 뉴욕에서 진보적인 ‘새로운 사회연구소’에서 강의했다. 이 시기에 집필한 책으로는 <기득권과 산업기술의 현황>(1919) <소유권 부재와 근대의 기업>(1923) 등이 있으며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아이슬란드 전설을 영어로 번역하여 <락스다엘라 사가>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예견했던 대공황이 엄습하기 얼마 전인 1929년 8월 3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근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저서 <변화하는 우리의 질서에 관한 단상들>은 그가 죽은 뒤 1934년에 출간되었다. 독자들은 늘 그를 정치적 급진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로 생각했지만 정작 그는 어떠한 형태의 정치적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비관주의자였다.
왜 <유한계급론>은 여전히 스테디셀러인가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왜 그럴까? 사회철학자 루이스 멈퍼드는 “베블런은 우리의 경제질서에 내재한 사회적 모순을 마르크스 이후 가장 선구적으로 분석한 학자였다”고 회고하면서 “그의 저서들은 실로 막대사탕 포장지에 감싸인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인격을 반영하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뉴딜정책을 주창한 경제학자 스튜어트 체이스는 “베블런은 미래세대가 나아갈 궤도를 그려보인 천문학자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의 초입에서 그는 “사실들을 수집하고 경제사적으로 가장 대담한 해석을 통해서 종합하여 향후 수십 년간 적용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한 이론적 틀을 제시함으로써 역사를 예견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의 시대에나 그 이후에도 금전 자체가 아닌 금전을 획득하려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행동방식을 그처럼 냉철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꿰뚫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튼 베블런은 부자들이 나머지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한, 그리하여 과거와 다를 바 없는 미래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한 지속적으로 읽힐 책 한 권을 써냈다고 평가된다.
과시적 소비, 과시적 낭비, 과시적 여가
베블런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음을 남들에게 증명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돈이 자신에게 아무 소용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야만사회에서는 약탈의 능력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쉽게 대중들의 존경을 불러일으키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어서 유한계급은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를 통해 그들의 약탈능력을 드러낸다. 또한 부자가 하인들을 고용하여 그들을 생산활동에서 제외시켰다고 말하면서 그처럼 세속적인 생각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망각도리 수 있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의복의 경우, 그것은 언제나 ‘증명용’이어서 “누가 보더라도 첫눈에 우리의 금력상의 지위를 알아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에 상류계급의 의복은 몸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기능과는 거의 무관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과시적 낭비, 과시적 여가, 과시적 소비에 몰두함으로써 “다양한 가치를 지닌 고급요리들, 음료와 장신구, 그럴싸한 의상과 저택, 무기, 게임, 무용수, 흥분제 등에 관한 전문가가 되기에 이른다.” 그것은 마치 미래를 내다볼 때에도 오로지 과거밖에 못 보는 자본가들과 같다. 그들이 소유한 공장들이 세계가 혁명에 휩싸여도 여전히 상품을 만들어내듯이 그들의 생활양식도 르네상스를 연상시키는 우아함을 흉내 낸다. 또한 그들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만일 노동자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체제를 붕괴시키려고 할 것을 우려해 문화적?사회적 통제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애국심, 민족주의, 군국주의, 제국주의 등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과시성을 지향하는 현대사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본가계급을 타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 비해 혁명적이라기보다는 훨씬 냉소적이었던 베블런은 부자들의 자화상을 신랄하게 묘사하는 데 자신의 정열을 바쳤다. 베블런이 부자들에게 그토록 혹독한 비난을 퍼부은 까닭은 “그들의 모든 종교적 믿음과 모든 소비패턴이 바로 프로테스탄트들이 종교개혁을 위해 싸워야했던 가톨릭주의의 유습이었다”는 데 있다. 그는 실용성보다는 과시성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의 소비가 “의례”나 “성례”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소비의 특징은 “신도들의 정신구조를 확연히 고양시키고 위무”하는 “사치스럽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신성한 건축물”에서 행해지는 “경건한” 의례나 성례를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나고 또 그런 의례나 예배 속에 가장 잘 농축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가 기껏해야 이성이 아닌 감정에 호소하는 제의적인 격세유전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갈파한다.
폭력과 스포츠의 과시성
빈민들은 야만인이고 부자들은 문명인이라는 통념에 반대하는 베블런은 양측이 다 폭력에 매력을 느낀다고 지적한다. 그는 “의견차를 해소하기 위한 보편적인 방법으로 여겨지는 결투에 통상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은 오직 상류계급 신사들과 무뢰배들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결투든 거리의 싸움이든 베블런이 보기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두 가지 싸움 모두 구경꾼들의 격정에 호소하면서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명성을 확인하고 과시하려는 “발달이 억제된 남자의 도덕성”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베블런이 보기에 스포츠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그 진행방식부터 지각없는 해로운 활동이다. 베블런은 스포츠를 종교생활과 비교하면서 거듭 부자나 빈민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스포츠에 대해서 미증유의 모욕을 퍼부어다. 그는 무뢰배 내지 범법자들이나 잘 훈련받은 스포츠맨이나 모두 “공동체나 사회의 일반적인 평균인들보다 더 쉽사리 공인된 어떤 신조의 신봉자가 되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종교적인 의례에 이끌리기도 더 쉽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베블런은 자유투를 하기 전에 성호를 긋는 현대의 농구선수들이나 승리를 확신한 순간 신에게 감사기도를 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여타의 현대 스포츠선수들을 보았더라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베블런이 보기에 종교와 스포츠 모두 행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전근대적인 활동이다. 그런 믿음을 가진 종교나 스포츠 옹호자들은, 예컨대, 인간에게는 신의 영광을 달성할 능력이 있다고 믿거나 미식축구의 결과도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스포츠가 사회에서 대표적인 역할을 하는 한, 즉 과시적 소비체제가 유지되는 한 스포츠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즉 그것은, 오늘날 경제적인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고대적인 생활양식’에 권좌를 내주는 것이다.
과시적 현대문화
베블런의 눈은 권위적인 대학도 피해가지 않는다. 고등교육 자체가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이미 약탈의 매력을 부추기는 활동이었다. 특유의 의례, 학사모, 가운, 배지 같은 특이한 복장을 통해 대학은 “일부 학문적 사도들을 대물림”하고 한 세대의 권위를 다음 세대에까지 세습하는 학자들로 구성된 “전문 성직자계급”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베블런이 보기에 대학은 무용한 상류계급 사람들을 유용한 사람들로 느끼게 만드는 기능을 제외하면 아무런 공적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는 “보수적”이고 심지어 “반동적”인 교육기관이다. 무엇보다도 대학교는 종교기관이었다. 베블런의 관점에서 보면 대학교들은 고전이나 인문학을 가르치고 “일반 학생들로 하여금 그런 류의 지식들을 습득하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도록” 후원하는 식의 구시대적인 관행들에 바쳐지는 “고등교육을 위한 신학교들”로 남았다고 비판한다.
베블런학파
그의 <유한계급론> 덕분에 영어권에서는 이른바 ‘베블런 학파 Veblenesque’라는 신조어가 출현했다. 지금까지 경제학계는 110여 년 전 베블런이 내놓은 저서에 필적할 만한 처방전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편, 오늘날 일반 대중에게도 알려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줄리엣 쇼어, 로버트 프랭크 등 다수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이 베블런의 영향 아래 배출되었다. 이제 누군가를 ‘베블런 학파’라고 부르는 것은 그(그녀)가 전문 경제학자들만 빼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확연히 알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맹점을 파헤치고 폭로하는 작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한계급론>의 현대적 의미
1899년에 출간된 <유한계급론>에는 ‘기존 제도에 대한 경제적 연구’(An Economic Study of Institutions)라고 부제가 붙어 있다. 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현대의 경제생활 연구에 적용하려 했다. 그는 산업화된 제도가 사람들에게 근면, 효율, 협동을 요구하는 반면, 실제로 산업계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고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는 데에만 여념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과거에 약탈을 일삼았던 미개사회의 잔재라고 주장했다. 이 흥미로운 책은 베블런이 철저히 경제학적 분석이라고 못을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독자들 대부분이 이 내용을 경제학적 분석이라기보다는 풍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베블런은 경제학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비평가로서도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베블런이 살던 시대의 생활만큼 현대의 생활도 불공정하다. 여전히 부자들은 일류대학에 입학하고, 금력과 인맥을 등에 업고 다른 이들보다 앞서서 출세를 보장받을 수 있다. 금력과 지위를 얻은 순간, 그는 ‘과시’를 통해 자신을 증명해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유한계급이 가치 없고 값이 비싼 것일수록 과시적 소비의 품목으로 높이 치고, 값이 싸고 유용한 것일수록 천하고 품위 없는 것으로 여길수록 <유한계급론>의 분석은 가치를 더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산의 소유가 사회적 존경의 기초가 되어 자기가 속한 계층의 사람들과 경쟁적 소비를 일삼게 된다. 그 소비의 악순환에 빠지면 노동자들은 그들의 수입에 상관없이 만성적인 불만에 빠질 것이고 역으로 그들은 금전적 문화에 순응하게 될 것이다. 이 악순환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유한계급론>을 통해 여전히 자본주의 경제제도의 모순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고, 그가 풍자하려고 했던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유한계급론]의 현대적 의미 - 앨런 울프
소스타인 베블런에 대하여
저자의 말
1. 유한계급의 기원
2. 금력과시경쟁
3. 과시적 여가
4. 과시적 소비
5.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금력
6. 취미생활을 규정하는 금력
7. 금력과시문화를 표현하는 의복
8. 생산노동을 면제받는 유한계급과 보수주의
9. 고대적 특성의 보존
10. 용맹성이 남긴 유산들
11. 행운에 대한 믿음
12. 종교의례
13. 비차별적 관심의 유산들
14. 금력과시문화를 표현하는 고등학문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