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행본
미국의 고등교육
- 발행사항
- 서울: 길, 2014
- 형태사항
- 337 p., 24cm
- 총서명
- 코키토총서
- 일반주기
- 029
소장정보
위치 |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출력 | 상태 | 반납예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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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가능 (1) |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 00030670 | 대출가능 | - |
이용 가능 (1)
- 등록번호
- 00030670
- 상태/반납예정일
- 대출가능
- -
- 위치/청구기호(출력)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책 소개
대학에 사업의 논리가 진입하면서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발생했다.
우선 학자들의 지식 추구를 평가할 능력이 없는 기업인이 이사회에 선임된다.
이사회가 이류 학자들 중에서 대학 총장을 선임한다. 총장 선임에는 졸업생들이 영향력을 행사한다.
일단 임명되면 총장이 독단적인 권력을 갖는다.
그런데 독립성이 강한 교수들이 쉽게 추종하지 않으므로
총장은 자신의 일을 추진하기 위해 음성적이지만 복종적인 파당을 거느리게 된다.
기업인 이사들과 총장은 예산 책정 등에 있어 대학을 지식 추구의 장소로 보지 않고
기업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이에 따라 이들은 영리를 따지고 학교를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전개한다. 또한 이들은 통계 자료를 활용해 학교의 실적을 보여주고,
입학생의 숫자 등을 광고하는 데 열중한다.
결과적으로 학문과 무관한 사람들이 자유로운 지식 추구에 대한 훼방꾼으로 대학에 등장한다.
사업의 원리가 지식 추구와 배치된다. 이는 사업이 학문에 배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들 사이의 경쟁과 특정 학교 내 학과들 사이의 경쟁이나 영토 싸움도 발생한다.
학부와 대학원의 공존, 대학 내 직업학교의 설립, 실용성을 강조하는 세부 과목의 증가,
취직을 위한 진학 등이 대학의 학문 추구를 방해한다. 이것은 중세에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던 것과 유사하게 근대에 학문이 금전의 시녀가 된 것을 의미한다. ― 홍훈, 「옮긴이 해제」 중에서
위의 글은 1918년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1929)이 『미국의 고등교육』(1918)에서 미국 대학을 비판한 내용이다. 이사회의 총장 선임 과정, 대학의 영리사업체화, 각종 통계수치를 내세운 학교 홍보, 대학 내 직업 교육의 증가, 학과들 사이의 경쟁, 학문의 고사 등, 100년 전 미국의 일임에도 지금의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과거 미국의 대학이 어떻게 태동했으며 상충되는 목표들 속에서 어떻게 변모해왔는가에 관한 베블런의 역사적이고도 제도적인 이 연구는 오늘날 우리 대학의 현재를 깊이 고민하고 새로운 미래를 구상하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통찰과 토론거리들을 제공해줄 것이다.
20세기 초 돈/금전이 지상가치로 등극해가던 자본주의의 부흥기
당대의 금전적인(pecuniary) 문화에 반기를 든 선도적 지식인
베블런은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 제도경제학파의 창시자이다. 엄청난 수의 이민자들이 몰려들고, 도시가 성장했으며, 대기업이 승승장구하면서 그 경영자들이 경제는 물론 사회문화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시기, 즉 낡은 미국이 해체되고 미국의 자본주의가 바야흐로 절정을 향해 가고 있던 때에 베블런은 그런 지배적인 흐름에 과감히 반기를 든 자본주의 비평가였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작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1899)에서 그런 면모가 잘 확인된다. 다윈주의의 진화론적 관점을 자신의 새로운 제도주의적 경제 분석 방식과 접목해 사회학과 경제학을 한데 묶은 이 책에서 그는 사회가 착취를 통해 삶을 영위하는 이들과 산업을 통해 영위하는 이들로 근본적으로 분열되었다고 주장했다. 착취할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한 자들에게 베블런은 “유한계급”(leisure class)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들은 생산적인 경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한가로움을 과시하는 행위를 한다. 베블런에 따르면, 사회가 성숙함에 따라 과시적인 여가가 “과시적 소비”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 둘은 모두 금전적 힘에 기반을 둔 차별화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뒤따르는 부의 증명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위해 이루어진다.
선도적인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베블런은 이윤을 위한 생산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고,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소비의 낭비적인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비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모색하는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기술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책 『미국의 고등교육』의 주장 역시 대체로 『유한계급론』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금전적 제도”의 맥락 속에서 “산업”이 “장사”의 희생양이었던 것처럼, “학문”(learning)은 “교육”(education)에 의해 희생양이 되고 오용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기업과 트러스트가 사업의 규범이 됨에 따라, 대학 속에서 조직화된 고등학문은 기부금과 학생을 둘러싼 사냥의 와중에 불필요하게 경쟁적이 되었다. 상류층의 품위 함양은 학부의 단과대학 곧 칼리지(undergraduate colleges)를 통해 추구되는 한편, 전문대학원(professional schools)은 전적으로 직업과 관련한 교육을 맡는다. 과학과 학문을 위해 애쓰기보다는 장터와 금전적 이득에서의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해 애쓴다. 대학의 이사회와 그 총장?“학문의 수장”(captain of erudition)?은 이들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만 전념한다. 그리고 엄격한 수양으로서의 학문과 강의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이 책은 대학까지 침투한 기업화 흐름을 저자 자신의 체험에 기반해서 관찰하고 그 미래를 통찰력 있게 진단한 결과물이다. (그의 저작들 대부분을 특징짓는) 우회적인 화법과 냉소적인 유머감각이 뒤섞인 이 책은 1900년대 초 미국 사회에 대한 냉정하고도 풍자적인 비평서이자 내부인과 외부인의 경계에 놓인 입장에서 써내려간 탁월한 관찰기이다.
미국 대학 사회 내의 이방인이었던 베블런
체험에서 비롯한 참여관찰 보고서이자 고급 에세이이자 독창적인 사회과학 연구서
위에서 언급했듯, 『미국의 고등교육』은 『유한계급론』과 비교해 베블런의 개인적 경험이 녹아 들어간 책이다. 베블런은 노르웨이 이주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무일푼에 영어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민을 왔다. 그들은 이민자로서 제한된 환경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노르웨이 출신이라는 배경과 미국 사회 내에서 비교적 고립된 처지에 있었다는 점이 베블런의 저작들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라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그는 1884년 예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음에도 교수직을 구할 수 없었던 탓에 7년간 부모의 농장에서 불행하고도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다. 마치 미국이 그를 거부한 것처럼 보였고, 마침내는 베블런 또한 자신이 속하지 못했던 미국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미국 대학들을 순례하기 시작한 것은 1891년부터로, 오래 머물거나 자신을 위한 안전한 거처로 느꼈던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가 몸을 담았던 학교 중에는 새로 설립되었던 시카고 대학과 릴랜드 스탠퍼드 대학이 있었는데, 바로 이들 두 대학에서의 불행했던 경험이 『미국의 고등교육』 집필에 반영되었다.(“이 책을 처음 준비했을 때의 주된 논지는 시카고 대학에서 초대 총장의 재임 기간에 이루어졌던 업부 처리에 관한 체험적 관찰에 기초한 것이었다.”) 1899년 당시 시카고 대학에서 강사로 있던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의 출간에도 불구하고 대학 내에서 불안정한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책 출간을 근거로 해서 몇백 달러 정도의 급여 인상을 요청했는데, 대학 총장은 이 요청을 듣고 그가 시카고 대학을 떠난다고 해도 아쉬울 것은 전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부교수로 자리를 옮긴 릴랜드 스탠퍼드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학내 문화와 불화를 겪고 결국 교수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지루하고 서툰 교수법, 괴팍한 성격이나 기행 등 개인적 차원의 문제도 원인이었지만 대학의 본질에 관한 그의 학자적 신념이 대학 경영진을 포함한 다수 대학인들의 관습적 믿음과 사뭇 달랐던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미국의 고등교육』은 과시적 본능이 지배하던 대학 사회에서 제작 본능과 한가로운 호기심에 부응해 학문에만 전념했던 어느 ‘이방인’이 예순에 이르러 그동안의 경험을 자양분 삼아 적어낸 일종의 참여관찰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심오한 통찰을 동반한 신랄한 풍자가 곁들여짐으로써 문학 작품의 향취까지 더해진 가운데, 대학의 기업화가 불가피하다거나 바람직하다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펼쳐진다. 또한 대학이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것은 대학이 아니라 직업학교의 책무라고 반박한다. 나아가 대학의 기업화를 선도하는 경영학과나 경영대학원의 경우 실상을 따져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자리 창출이나 산업 활동의 확대에는 기여하지 못한 채 사람들의 약탈적·과시적 본능에만 호소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미국 대학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당했던 베블런이 주변인이자 관찰자로서 미국 대학을 그리고 미국 사회를 속속들이 관찰한 내용이 이 책이 담겨 있다. 그의 비판은 대학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데, 그 비판의 어법은 때로 난해해 보일 정도로 우회적이고 비유적이지만, 또한 그 때문에 그 신랄함과 조롱조의 어투가 더욱 돋보인다.
그런데 『미국의 고등교육』은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하는 인류학적 기록물이나 재기 넘치는 고급 에세이를 뛰어넘는 본격적인 사회과학 연구물이기도 하다. 이 책은 기업화나 직업 교육은 물론 학부나 교양 교육의 확대, 시민정신의 고양과 같이 대학의 책무로 간주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데, 이는 대학의 본질적 속성과 제도적·관습적 기능을 구분한 위에 대학의 발생과 진화를 역사적으로 해명하려는 베블런 고유의 방법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실에서는 과시적 본능이 학문 탐구를 압도함으로써 학부와 전문대학원을 키우는 방향으로 관습과 제도가 형성되었지만, 그럼에도 대학의 본질은 학문 탐구이며, 교육은 연구 활동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한에서만 대학의 고유한 속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기본 입장이다.
근대 문명에서 대학이 차지하는 위상과 고유한 직분
학부대학과 직업 교육에 밀려나버린 학문 연구
베블런은 대학의 직분이란 “지식의 영역을 보존하고 확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대의상)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거의 없을 것이다. 이때 지식은 궁극적으로 실용적인 사용을 위한 의도 없이 사물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지식을 의미한다. 배움은 목적 그 자체로, “사람들 사이에 지식을 증대하고 확산하는 활동”은 모든 계몽된 공동체나 공적 정신을 지닌 문명으로부터 가장 인간적이고 가치 있는 활동으로 거리낌 없이 인정받고 있다. 근대의 대학은 이러한 지적 활동과 독특하면서도 유독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식 탐구의 의무를 의심할 나위 없이 부여받았다고 유일하게 인정된 근대 문화의 제도가 바로 대학이다.
고등학문의 보존 및 진전은 서로 구분되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방향의 본업과 연관되어 있다. (a) 과학과 학문의 탐구 (b) 학생 교육. 이 중에서도 우선적이면서 불가결한 것은 전자이다. 대학에 특성을 부여하고 중등학교와 차별짓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지적 기획의 작업이다. 교육이라는 작업은, 그것이 대학인들의 연구 활동을 자극하고 촉진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는 한에서만, 대학 고유의 속성일 수 있다. … 대학의 활동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게 마련인 교육은, 후속적인 지식 탐구를 겨냥한 다음 학문 세대의 훈련에 초점이 맞추어질 때 비로소 연구 활동과 순조롭게 결합될 수 있으며 고등학문의 강화로도 즉시 연결될 수 있다. 다른 목적을 위한 교육은 그 성격이 다른 종류의 것이므로, 다른 종류의 학교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러한 일들을 대학의 본업이라고 부르고, 유일한 관심사가 고등학문이어야 할 사람들과 장비들에 그 부담을 지운다고 해서, 이들이 곧 대학의 본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인용에서와 같이 베블런은 과학과 학문의 지속적인 탐구에 기여하지 않는, “다른 목적”을 위한 교육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런 교육은 대학이 아닌 다른 교육기관이 제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베블런 당대의 미국 대학에서조차 금전적 이득이나 실용적 쓸모와는 무관한 학문의 추구보다 장래에 확실한 돈벌이 기회를 가져다줄 수 있는 “직업 교육”을 중시하는 흐름이 보이고 있었다. 금전적 이득의 획득이 지상가치로 등장함에 따른 결과였다.
전문인 양성학교 즉 전문대학원이나 학부대학 내에서는 설명과 지시, 연습이 교육 과정의 대부분을 이룬다. 이들 학교가 추구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 추구해야 할 일관된 목표는, 결과적 지식을 알려주고 되풀이하여 가르치며, 이를 적용할 일솜씨를 길러주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학생과 교수의 관계는 초등학생과 담임교사의 관계가 아니라 도제와 장인의 관계”여야만 한다. “대학은 자신의 일자리만을 좇는 개인들의 성공 전략이 아니라 문명인의 문화적 열망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직업 교육이나 시민으로서의 삶을 위한 능력 함양은 대학이 아닌 별도의 학교에서 추구되어야 하는데, 이는 그러한 교육이 덜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대학에 맞지 않고 따라서 대학에서는 적절히 제공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대학과 더 낮은 등급의 학교(lower schools)나 전문인 양성학교 사이의 차이는 넓고도 단순하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라기보다는 종류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 전체 교육 시스템 속에서 대학보다는 중등교육기관 및 전문인 양성학교에 더 많은 그리고 더 무거운 책임이 부과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시민정신은 학문보다 더 광범위하고 중요한 범주이다. 그리고 문명화된 삶의 확장은 그 자체의 한가로운 목적 속에서 행해지는 지식 추구에 비해 한층 더 광범위하고 중요한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의 탐구를 수행해야 할 기관들에 그것과 무관한 외적인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시민정신이나 현실적 업무 능력의 함양과 같이 그 자체로 중대한 외재적 문제들까지 다루도록 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들은 너무도 중요한 의무들이기 때문에 학문의 전당에 의해 부차적 문제로 다루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학문의 전당에 있는 교수들이란 그들 자신의 고유한 일에 관해서는 적임자이겠지만, 세속적 지혜에 관한 한 전문가나 실무인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 학부대학과 전문대학원이 진짜 대학(베블런은 대학의 정의에 비추어 ‘대학원’이 진짜 대학이라고 생각한다)과 하나의 대학 법인 내에 속하게 됨으로써 목적, 업무, 정신과 관련해 본질적 불일치가 발생한다. 이는 양자가 본래적으로 추구해야 할 각각의 목표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한다. 지식의 추구 및 취업 준비라는 양쪽의 목표는 양립 가능한 두 축이 아니다. 양쪽 모두에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 학문의 추구는 심각한 방해를 받게 된다.
대학 그리고 전문인 양성학교 및 기술학교, 양쪽의 허영이 어느 정도는 손상되겠지만, 이들의 본질적 이익을 위해서는 이 둘 사이가 완전하게 분리될 필요가 있다. 오직 이러한 조건에서만 양자는 본연의 일을 제대로 능숙하게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교정 안에서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과학과 학문?사실적 지식(matter-of-fact knowledge)의 추구?이외의 어떠한 목적이나 관심사도 훼방꾼으로 치부되어야 한다.
기업의 논리에 물든 대학 지배구조의 문제
이사회의 구성과 총장 선출 방식으로부터
미국의 대학 이사회는 (과거 성직자가 다수 포진하던 때와 비교해 현저히) 세속화되었다. 이때 세속화는 오늘날 사회의 지배적인 정서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사업가로의 대체가 대세를 이룬다.
사람들이 이러한 사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즐겨 내세우는 근거로는 대학 법인의 재정적 문제를 다룰 노련한 실무인의 필요성을 들 수 있다. … 이러한 추세는 많은 부분이, 학문의 전당에 대한 후견인으로서의 특별한 능력을 입증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부자들 특히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커다란 존경을 받는 세태와 무관하지 않다. 사업에서의 성공은 사업과 무관한 일에서조차 유능할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사업가가 대학 법인의 금전적 복지를 돌보는 것은 물론 대학의 설립 목적인 지적 활동에 대한 추구를 후원하고 통제하는 적임자로도 선호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들 기업인 이사들이 대학 정책의 세세한 사항들을 직접 관리, 감독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지출 예산을 통제한다. 그러나 대학의 학술 활동은 이사회의 예산 통제에 의해 지배된다. 대학의 교직원들이 예산에 의해 명시된 사항 이외의 일을 벌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습관적으로 그리고 기질적으로 유형의(tangible) 금전적 가치에 민감하고 그것을 높게 평가하게 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기민한 이사회라면 대학의 수입 중 보다 많은 부분을, 가령 부동산의 가치를 높이고 꾸미는 데 투입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사업가적인 검약에 익숙한 이사회는 또한 남은 수입 중 적지 않은 몫을 감채기금(sinking fund)으로 적립해 예상치 못한 우발적 상황에 막연히 대비하려 할 것이다. 반면 대학의 교직원들은 (소문날 정도로) 낮은 보수와 적은 인력을 감수함으로써 업무 역량을 심각하게 훼손당한다. 교직원들이 도서나 당기의 사용을 위한 실험실습 기자재의 구입을 요구할 경우, 이사회는 요구액의 일부 가령 10~15퍼센트 만을 마지못해 용인하는 인색한 해법을 내놓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용도로 배정된 자금조차도 적지 않은 몫이, 현재의 지배적인 가격보다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을 미래의 어느 시점까지는, 사용되지 않은 채 적립되기만 할 것이다.
또한 이사회는 이와 같은 능률지상주의로 인해 경상지출 용도로 할당된 자금을, 사업가적 기질이 있는 학생들을 육성하거나 즉각적인 수익을 낳을 것으로 여겨지는, “실용적”이거나 또는 실용적에 가까운 교육 노선 및 학술적 선전 등에 우선적으로 배분한다.(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제공하는 쪽에 대학의 관심과 노선이 집중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의 문제가 대학 총장의 경우에도 발견된다. 예산 명세서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에 총장에게 허용된 재량의 여지는 일반적으로 광범위하지도 본질적이지도 않다. 실제로 그는 이사회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데, 이때 그 책임은 주로 예산의 금전적 명세를 준수할 것에 집중된다.
대학 수장이 일반적으로 이사회의 선택에 의해 임명된다는 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사회는 임명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구미에 맞는 대학 총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대학의 수장으로 선발되는 주요한 기준은 그 사람의 사업적 능력이다. 물론 이 표현은 다소 특수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될 사람이라면 그러한 능력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현재 널리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다. … 신임 총장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예의상 그런 것이건 명문화된 규정에 의한 것이건, 동문회의 의견을 반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의 결과도 그렇지 않은 경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문제가 동문들의 몫인 한, 동문들 중 성공한 사업가들이 지배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오늘날의 대중적 정서를 고려한다면 당연한 결과이다.
영리기업의 시스템을 모방하는 학교 행정 체계와 정책
상품화될 수 있는 지식을 거래하는 사업장이 된 대학
사람들은 대학을 기업과 유사하게 재편하고 통제해야 할 커다란 필요성 위에서 대학의 장비·인력·일상 업무 등에 관해 상세히 거론하고 있다. 효율적 시스템에 대한 이러한 주장 속에는 이들 배움의 자치체가 잘 관리된 사업체의 패턴을 따라 조직적으로 업무를 배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이 입장에서 대학은 상품화될 수 있는 지식을 거래하는 사업장으로 간주되는데, 이를 지배하는 학문의 수장은 수중의 수단들을 실행 가능한 최대한의 산출을 통해 이익으로 전환할 것을 소임으로 삼는다. 대학은 막대한 자금을 가진 법인이다. 그리고 사업의 일상적인 훈련으로 편견을 지니게 된 사람들에게는 대학을 투자나 매출액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소매업계의 경쟁하는 기업들이 고객을 놓고 경쟁을 벌이듯, 대학들도 시장성 있는 교육 장사에 뛰어들어 경쟁을 벌인다. 이제 경쟁적 사업체를 이끄는 경영진들의 임무는 전략적 성격을 띤다. 총장은 자신의 지휘 아래 일하는 “종업원과 부하직원들”을 전적으로 통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그의 정책 방향에 속한 직원들의 즉각적이고도 확고한 충성에 의지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는 따라서 채용과 해고 그리고 보상과 징계를 그 수단으로 휘두른다. “교수들은 특정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특정의 계획된 판매 가능한 결과들을 산출해내도록 고용된 일군의 종업원들로 인식될 뿐이다.” 효율적인 정책 추진을 위해 총장은 필연적으로 전체 교수들 중에서 신뢰할 만한 자문단과 행동대원들을 주변에 모으게 된다. 이들 참모나 자문역들은 학교 내에서 높은 직위를 차지할 수 있고, 학자로서도 높은 지위를 점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그에 따른 높은 보수도 따른다.(각종 행정직을 맡은 이들 교수는 장래에 총장 후보를 지망할 때에도 우선적으로 고려될 확률이 높다.)
이렇게 구성된 학사 행정 체계 아래서 막대한 매출과 산출을 거둘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역시 학부대학과 일군의 전문인 양성학교 즉 전문대학원이다. 이 구성 요소들은 보다 많은 학생의 등록, 수여되는 여러 학위의 숫자들, 대중 강좌 그리고 교과 과정 등등의 관점에서 통계적으로 압도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 과정에서 대학의 학문을 진척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학원 과정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불어 운동 시설이나 학내 편의시설, 정기적인 전시회나 축제 등이 부가적으로 추가된다.
대학의 학문적 일상에 일어난 변화
사교와 취미, 유한계급에게 필수적인 교양 활동의 증가
기업적 경영으로의 이행을 기점으로, 규모 이외의 다른 차원에서도 모종의 주목할 만한 변화를 겪고 있다. 학부나 칼리지는 숫자의 증가와 함께 배움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 이외의 다른 기능들도 점점 더 많이 떠안게 되었다. 이 숫자의 증가는 동시에 늘어난 학생 집단의 학문적인 양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즉 대학을 다니는 이유를 빈말로라도 지식의 추구에서 찾지 않는 학생들의 비중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것이다. 명예로운 졸업을 인증하는 학사학위의 취득을 위해 마땅히 준수해야 할 의무 재학 기간으로 일부 평판 좋은 대학에서 운영 중인 “학부 과정”(college course)은 관습적인 교양의 힘에 의해 상류층의 필수품이 되었다. 전체 학생들 중 이 상류층 출신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으며, 대학의 이사진들 역시 이들의 등록이나 재학을 후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인식하게 됨에 따라, 대학의 조직 또한 전략적 필요에 의해 무엇보다도 이들 상류층 학생들의 요구에 최대한 부응하게 되었다.
유한계급 출신의 학생들은, 그리고 이들이 다수에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 전체 학생들 또한, 학업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이 다른 것들에 관심을 보이는 한, 대학은 반드시 이 관심사들을 잘 챙겨주어야 한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그들의 애호와 호의를 잃게 되며, 결국 그 이탈과 함께 이 대학에 대한 상류사회의 평판도 악화되고 등록률 또한 심각하게 저하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의 수강과 연구 활동보다는 사교 클럽, 동호회, 전시회, “학생 활동”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범위에 걸친 학문 외적 교류가, 즉 우아하고 무해한 유흥의 수단과 방법이 대학의 일상에 점점 더 깊숙이 침투한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가 효과를 거두어 (상류층 출신이 다수 포함된) 등록생 수가 늘어난다면, 그에 따라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난다. “명예로운 만기 졸업을 위해 쌓아두어야 할 학점 취득 이외의 학문 연구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열의 없는 학생들을 위해 교과 과정이 수정되는 것이다. 많은 수의 학생들을 위한 대규모의 학업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고, 따라서 제공되는 교육은 표준화된 시간 단위, 학점, 학습 내용의 크기로 약분된다. 이러한 학사 관리 업무를 보다 용이하고 정확하게 수행할 목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주어진 교과목들을 한층 현란하게 보일 목적으로 과목들의 숫자는 늘리고 대신 무게와 용량은 줄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베블런은 선택과목 제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심도 있는 학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것은 별볼일없는 수준의 형식적인 공부가 되고 만다. “학업 생활을 과제물을 치장하는 일 주변에서만 맴돌게 된다.”
교육뿐 아니라 연구 활동에까지 미치는 악영향
대학 학문의 불임화
형식적인 학업이나 기계적인 회계 업무는 학부에서 갈수록 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 곳은 대학원 부분이다.
대체로 특정 학과 구성원들에 의해 제공되는 강의들의 전공 분야 숫자가 해당 학과 구성원들의 숫자를 능가한다면, 일부 전공 분야나 강좌는 형식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으며 기껏해야 평범한 결과만을 낳게 마련이다. … 강사가 교과목 자체에 진지한 관심을 제대로 쏟는 게 당연한 전공 수업의 경우에도 그들의 시간과 에너지가 여러 강의들에 분산된다면 피상적인 관심 이상의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훌륭한 작업, 말하자면 연구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충분히 훌륭한 작업은 자유로운 재량권과 여유로운 시간 그리고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차별화된 전공 과목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면, 그리고 늘 그러하듯이 이들 과목이 교수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강의 시간으로 배정되고 따라서 무엇에도 확고하고도 지속적으로 집중할 수 없게 한다면, 제공되는 강의는 형식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강의의 질 또한 비전문적이고 현학적으로 악화되게 마련이다. 학과 구성원들의 전문적인 능력이 아니라 다루는 과목들의 범위를 최대한 확장하는 것만을 중시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결과가 예외적이라고 할 수 없다.
학생들만 형식적인 학문 추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영향이 교수 즉 연구자들에게까지 미친다. 과도하게 많은 교과목을 처리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 분야에 투입할 시간과 에너지가 더 이상 남지 않을 정도로 피상적이 비전문적인 강의에 소모되고 있다. 거기에 각종 행정 업무까지 곁들여진다. 연구 활동은 저만치 뒤로 미루어지고 “대학의 불임화”가 초래되고 있는 것이다.
헛된 명성에의 추구 가운데 고사하는 학문
고객 유치를 위한 가시적 통계의 제시
이 모든 것은 결국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대학 간 경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할 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한때 연구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도입되었던 장학금 제도마저 변질되고 있다. 명예로움 탁월함에 대해 부여되었던 상당 금액의 장학금은 이제 보다 많은 학생들을 위해 잘게 쪼개지고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장학금 제도를 내세워 학문 부흥에 적극적인 학교로서의 이미지를 관리한다.
또한 대학의 교수들 특히 총장은 대외적으로 학교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대중강좌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러한 대중강좌의 청중은 대개 근무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교양 강좌를 호사취미로 즐길 수 있는 상류층 인사들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고객들은 비단 등록생만이 아니다. 학교에 거액의 기부금을 희사할 수 있는 지역사회의 부유한 자들이 보다 중요한 고객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일련의 홍보 활동을 위해 동원되는 것은 가시적인 통계숫자들이다. 등록생 수, 취업률, 장학금 제도, 다양한 교과목의 수, 화려한 캠퍼스 건물 그리고 실제의 학문적 업적과는 무관한 명망가적인 교수의 숫자 등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정작 투자되어야 할 실험실과 교육 자재, 그리고 도서관은 황폐한 지경으로 방치되고 만다. 기자재가 없는 실험실, 책이 없는 도서관, 의미 없는 모금, 토건 국가를 모방한 대학 내의 건설 붐 등, 대학 내 곳곳으로 침투한 효율성의 논리, 자본의 논리에 의해 대학이, 학문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21세기 한국 대학의 위기
베블런의 대학 비판에서 무엇을 참조할 수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언론이 대학을 평가하고 있다. 평가 기준은 논문 인용 지수, 평판, 재정 상황 등이다. 언론사 대학 평가가 수험생, 학부모, 기부자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대학도 언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베블런이 지적했듯, 대학이 학교 홍보에 목을 매고 있다.
대학 총장의 선출 과정을 보자. 이미 전국 40개 국립대학이 총장 직선제를 포기한 상황이다. 대학의 학문적 자율성은 재정 지원을 빌미로 한 정부의 통제 아래 속수무책으로 놓이게 되었다. 비록 베블런 당대의 미국 대학과는 달리 기업인 중심 이사회가 대세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소수의 위원들로 구성된 선출위원회가 총장을 간선으로 뽑는 상황에서, “로또 총장”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게다가 그렇게 선출된 총장들은 재정 확충 방안과 캠퍼스 개발 계획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베블런이 말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면모를 보인다. 그 주체가 기업인 이사회이건 정부이건 간에 학문 본연의 가치를 폄하하고 허울 좋은 “경쟁력”이라는 이름 아래 예산을 손에 쥔 채 대학의 목을 죄고 있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렇다고 기업 논리에 따른 대학의 영리사업체화가 베블런 당대에 비해 덜 진척되었다고 보기에도 어려운 것이, 최근 몇몇 대기업이 대학을 인수하면서 추진하는 여러 정책들이 학생과 교수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또한 사학 재단의 비리는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각 대학의 캠퍼스에 우후죽순처럼 솟고 있는 거창한 건물들만 보아도 대학의 효율적인 경영이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이 향하는 곳은 진정한 대학인이라 할 “연구자”(교수 그리고 학문에 뜻을 둔 학생들)을 위한 기관이 아니다. 경영대학원은 오래전부터 학내에서 가장 인기 좋은 부문이 되었고, 이제는 법학대학원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학부대학도 마찬가지여서, 취업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학과들은 폐과라는 칼을 맞고 있다. “대학”이라는 이름이 “취업학원”이나 다를 바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대학 졸업장이 취업을 보장해주지도 못하는 게 현실이다. 혹여 학문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있다 해도 살인적인 등록금을 해결하느라 생계를 위협을 느끼고 있는 형편이다. 결국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급의 학생들은 학문의 장에 진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비용 절감을 위한 일관적인 정책은 시간강사의 과도한 활용으로 이어져 연구자들의 (정신적.물리적) 죽음을 방조/강요하고 있다.
베블런이 이 책 『미국의 고등교육』에서 제시하는 해법이 있기는 하다. 대학을 대학원으로 축소하고 이사회와 총장직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대학원을 통한 전문인력 양성은 별도의 전문 교육기관으로 넘기고, 시민적 덕성의 고취를 위한 학부의 교양교육은 중등교육기관의 몫으로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이 진정한 학문의 전당이 되기 위해서는 학자의 자치체가 되어야 하며 그러려면 대학원 이외의 장식물들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베블런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해법이다.(그러나 베블런은 존 듀이 등 동시대의 진보적인 학자들과 함께 대안대학인 뉴욕 “사회과학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현재의 뉴스쿨 대학)을 세우는 등 실제로 현실적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블런의 (유보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그가 비판하고 있는 대학 사회 도처의 문제들이다. 그의 지적은, 사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던 당연한 데에까지 미친다. 문제는 베블런만큼이나 철저히 속속들이 “대학의 본질”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반성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곳곳에서 대학의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진정으로 담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이며, 그를 위해 어떠한 것들이 문제점으로 사고되어야 할지를 총체적으로 고민할 때, 1918년 미국의 대학을 비판한 베블런의 글이 하나의 중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베블런의 이 책은 현재의 미국 대학보다는 현재의 한국 대학과 교육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20세기 초의 미국 대학을 다룬 이 글은 당시의 상황에서부터 학교 당국자들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마치 현재의 한국 대학을 설명한 듯 낯설지 않다. 서로 다른 시대의 서로 다른 사회문화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성이 많다. 시대를 뛰어넘는 이런 유사성이 당시 미국의 기업과 현재 한국의 재벌기업 사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점 역시 덧붙일 필요가 있다.―홍훈, 「옮긴이 해제」 중에서
우선 학자들의 지식 추구를 평가할 능력이 없는 기업인이 이사회에 선임된다.
이사회가 이류 학자들 중에서 대학 총장을 선임한다. 총장 선임에는 졸업생들이 영향력을 행사한다.
일단 임명되면 총장이 독단적인 권력을 갖는다.
그런데 독립성이 강한 교수들이 쉽게 추종하지 않으므로
총장은 자신의 일을 추진하기 위해 음성적이지만 복종적인 파당을 거느리게 된다.
기업인 이사들과 총장은 예산 책정 등에 있어 대학을 지식 추구의 장소로 보지 않고
기업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이에 따라 이들은 영리를 따지고 학교를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전개한다. 또한 이들은 통계 자료를 활용해 학교의 실적을 보여주고,
입학생의 숫자 등을 광고하는 데 열중한다.
결과적으로 학문과 무관한 사람들이 자유로운 지식 추구에 대한 훼방꾼으로 대학에 등장한다.
사업의 원리가 지식 추구와 배치된다. 이는 사업이 학문에 배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들 사이의 경쟁과 특정 학교 내 학과들 사이의 경쟁이나 영토 싸움도 발생한다.
학부와 대학원의 공존, 대학 내 직업학교의 설립, 실용성을 강조하는 세부 과목의 증가,
취직을 위한 진학 등이 대학의 학문 추구를 방해한다. 이것은 중세에 철학이 신학의 시녀였던 것과 유사하게 근대에 학문이 금전의 시녀가 된 것을 의미한다. ― 홍훈, 「옮긴이 해제」 중에서
위의 글은 1918년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1929)이 『미국의 고등교육』(1918)에서 미국 대학을 비판한 내용이다. 이사회의 총장 선임 과정, 대학의 영리사업체화, 각종 통계수치를 내세운 학교 홍보, 대학 내 직업 교육의 증가, 학과들 사이의 경쟁, 학문의 고사 등, 100년 전 미국의 일임에도 지금의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과거 미국의 대학이 어떻게 태동했으며 상충되는 목표들 속에서 어떻게 변모해왔는가에 관한 베블런의 역사적이고도 제도적인 이 연구는 오늘날 우리 대학의 현재를 깊이 고민하고 새로운 미래를 구상하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통찰과 토론거리들을 제공해줄 것이다.
20세기 초 돈/금전이 지상가치로 등극해가던 자본주의의 부흥기
당대의 금전적인(pecuniary) 문화에 반기를 든 선도적 지식인
베블런은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 제도경제학파의 창시자이다. 엄청난 수의 이민자들이 몰려들고, 도시가 성장했으며, 대기업이 승승장구하면서 그 경영자들이 경제는 물론 사회문화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시기, 즉 낡은 미국이 해체되고 미국의 자본주의가 바야흐로 절정을 향해 가고 있던 때에 베블런은 그런 지배적인 흐름에 과감히 반기를 든 자본주의 비평가였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작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1899)에서 그런 면모가 잘 확인된다. 다윈주의의 진화론적 관점을 자신의 새로운 제도주의적 경제 분석 방식과 접목해 사회학과 경제학을 한데 묶은 이 책에서 그는 사회가 착취를 통해 삶을 영위하는 이들과 산업을 통해 영위하는 이들로 근본적으로 분열되었다고 주장했다. 착취할 수 있는 권력을 소유한 자들에게 베블런은 “유한계급”(leisure class)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들은 생산적인 경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한가로움을 과시하는 행위를 한다. 베블런에 따르면, 사회가 성숙함에 따라 과시적인 여가가 “과시적 소비”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 둘은 모두 금전적 힘에 기반을 둔 차별화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뒤따르는 부의 증명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위해 이루어진다.
선도적인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베블런은 이윤을 위한 생산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하고,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소비의 낭비적인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비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모색하는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기술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책 『미국의 고등교육』의 주장 역시 대체로 『유한계급론』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금전적 제도”의 맥락 속에서 “산업”이 “장사”의 희생양이었던 것처럼, “학문”(learning)은 “교육”(education)에 의해 희생양이 되고 오용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기업과 트러스트가 사업의 규범이 됨에 따라, 대학 속에서 조직화된 고등학문은 기부금과 학생을 둘러싼 사냥의 와중에 불필요하게 경쟁적이 되었다. 상류층의 품위 함양은 학부의 단과대학 곧 칼리지(undergraduate colleges)를 통해 추구되는 한편, 전문대학원(professional schools)은 전적으로 직업과 관련한 교육을 맡는다. 과학과 학문을 위해 애쓰기보다는 장터와 금전적 이득에서의 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해 애쓴다. 대학의 이사회와 그 총장?“학문의 수장”(captain of erudition)?은 이들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만 전념한다. 그리고 엄격한 수양으로서의 학문과 강의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된다.
이 책은 대학까지 침투한 기업화 흐름을 저자 자신의 체험에 기반해서 관찰하고 그 미래를 통찰력 있게 진단한 결과물이다. (그의 저작들 대부분을 특징짓는) 우회적인 화법과 냉소적인 유머감각이 뒤섞인 이 책은 1900년대 초 미국 사회에 대한 냉정하고도 풍자적인 비평서이자 내부인과 외부인의 경계에 놓인 입장에서 써내려간 탁월한 관찰기이다.
미국 대학 사회 내의 이방인이었던 베블런
체험에서 비롯한 참여관찰 보고서이자 고급 에세이이자 독창적인 사회과학 연구서
위에서 언급했듯, 『미국의 고등교육』은 『유한계급론』과 비교해 베블런의 개인적 경험이 녹아 들어간 책이다. 베블런은 노르웨이 이주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무일푼에 영어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민을 왔다. 그들은 이민자로서 제한된 환경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많은 연구자들이 노르웨이 출신이라는 배경과 미국 사회 내에서 비교적 고립된 처지에 있었다는 점이 베블런의 저작들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라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그는 1884년 예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음에도 교수직을 구할 수 없었던 탓에 7년간 부모의 농장에서 불행하고도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다. 마치 미국이 그를 거부한 것처럼 보였고, 마침내는 베블런 또한 자신이 속하지 못했던 미국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미국 대학들을 순례하기 시작한 것은 1891년부터로, 오래 머물거나 자신을 위한 안전한 거처로 느꼈던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그가 몸을 담았던 학교 중에는 새로 설립되었던 시카고 대학과 릴랜드 스탠퍼드 대학이 있었는데, 바로 이들 두 대학에서의 불행했던 경험이 『미국의 고등교육』 집필에 반영되었다.(“이 책을 처음 준비했을 때의 주된 논지는 시카고 대학에서 초대 총장의 재임 기간에 이루어졌던 업부 처리에 관한 체험적 관찰에 기초한 것이었다.”) 1899년 당시 시카고 대학에서 강사로 있던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의 출간에도 불구하고 대학 내에서 불안정한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책 출간을 근거로 해서 몇백 달러 정도의 급여 인상을 요청했는데, 대학 총장은 이 요청을 듣고 그가 시카고 대학을 떠난다고 해도 아쉬울 것은 전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부교수로 자리를 옮긴 릴랜드 스탠퍼드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학내 문화와 불화를 겪고 결국 교수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지루하고 서툰 교수법, 괴팍한 성격이나 기행 등 개인적 차원의 문제도 원인이었지만 대학의 본질에 관한 그의 학자적 신념이 대학 경영진을 포함한 다수 대학인들의 관습적 믿음과 사뭇 달랐던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미국의 고등교육』은 과시적 본능이 지배하던 대학 사회에서 제작 본능과 한가로운 호기심에 부응해 학문에만 전념했던 어느 ‘이방인’이 예순에 이르러 그동안의 경험을 자양분 삼아 적어낸 일종의 참여관찰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심오한 통찰을 동반한 신랄한 풍자가 곁들여짐으로써 문학 작품의 향취까지 더해진 가운데, 대학의 기업화가 불가피하다거나 바람직하다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펼쳐진다. 또한 대학이 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것은 대학이 아니라 직업학교의 책무라고 반박한다. 나아가 대학의 기업화를 선도하는 경영학과나 경영대학원의 경우 실상을 따져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일자리 창출이나 산업 활동의 확대에는 기여하지 못한 채 사람들의 약탈적·과시적 본능에만 호소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미국 대학에서 배척당하고 소외당했던 베블런이 주변인이자 관찰자로서 미국 대학을 그리고 미국 사회를 속속들이 관찰한 내용이 이 책이 담겨 있다. 그의 비판은 대학 구석구석까지 미치지 않는 데가 없는데, 그 비판의 어법은 때로 난해해 보일 정도로 우회적이고 비유적이지만, 또한 그 때문에 그 신랄함과 조롱조의 어투가 더욱 돋보인다.
그런데 『미국의 고등교육』은 대학의 기업화를 비판하는 인류학적 기록물이나 재기 넘치는 고급 에세이를 뛰어넘는 본격적인 사회과학 연구물이기도 하다. 이 책은 기업화나 직업 교육은 물론 학부나 교양 교육의 확대, 시민정신의 고양과 같이 대학의 책무로 간주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데, 이는 대학의 본질적 속성과 제도적·관습적 기능을 구분한 위에 대학의 발생과 진화를 역사적으로 해명하려는 베블런 고유의 방법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실에서는 과시적 본능이 학문 탐구를 압도함으로써 학부와 전문대학원을 키우는 방향으로 관습과 제도가 형성되었지만, 그럼에도 대학의 본질은 학문 탐구이며, 교육은 연구 활동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한에서만 대학의 고유한 속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그의 기본 입장이다.
근대 문명에서 대학이 차지하는 위상과 고유한 직분
학부대학과 직업 교육에 밀려나버린 학문 연구
베블런은 대학의 직분이란 “지식의 영역을 보존하고 확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대의상)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거의 없을 것이다. 이때 지식은 궁극적으로 실용적인 사용을 위한 의도 없이 사물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지식을 의미한다. 배움은 목적 그 자체로, “사람들 사이에 지식을 증대하고 확산하는 활동”은 모든 계몽된 공동체나 공적 정신을 지닌 문명으로부터 가장 인간적이고 가치 있는 활동으로 거리낌 없이 인정받고 있다. 근대의 대학은 이러한 지적 활동과 독특하면서도 유독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식 탐구의 의무를 의심할 나위 없이 부여받았다고 유일하게 인정된 근대 문화의 제도가 바로 대학이다.
고등학문의 보존 및 진전은 서로 구분되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두 가지 방향의 본업과 연관되어 있다. (a) 과학과 학문의 탐구 (b) 학생 교육. 이 중에서도 우선적이면서 불가결한 것은 전자이다. 대학에 특성을 부여하고 중등학교와 차별짓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지적 기획의 작업이다. 교육이라는 작업은, 그것이 대학인들의 연구 활동을 자극하고 촉진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는 한에서만, 대학 고유의 속성일 수 있다. … 대학의 활동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게 마련인 교육은, 후속적인 지식 탐구를 겨냥한 다음 학문 세대의 훈련에 초점이 맞추어질 때 비로소 연구 활동과 순조롭게 결합될 수 있으며 고등학문의 강화로도 즉시 연결될 수 있다. 다른 목적을 위한 교육은 그 성격이 다른 종류의 것이므로, 다른 종류의 학교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러한 일들을 대학의 본업이라고 부르고, 유일한 관심사가 고등학문이어야 할 사람들과 장비들에 그 부담을 지운다고 해서, 이들이 곧 대학의 본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인용에서와 같이 베블런은 과학과 학문의 지속적인 탐구에 기여하지 않는, “다른 목적”을 위한 교육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런 교육은 대학이 아닌 다른 교육기관이 제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베블런 당대의 미국 대학에서조차 금전적 이득이나 실용적 쓸모와는 무관한 학문의 추구보다 장래에 확실한 돈벌이 기회를 가져다줄 수 있는 “직업 교육”을 중시하는 흐름이 보이고 있었다. 금전적 이득의 획득이 지상가치로 등장함에 따른 결과였다.
전문인 양성학교 즉 전문대학원이나 학부대학 내에서는 설명과 지시, 연습이 교육 과정의 대부분을 이룬다. 이들 학교가 추구하고 있으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 추구해야 할 일관된 목표는, 결과적 지식을 알려주고 되풀이하여 가르치며, 이를 적용할 일솜씨를 길러주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학생과 교수의 관계는 초등학생과 담임교사의 관계가 아니라 도제와 장인의 관계”여야만 한다. “대학은 자신의 일자리만을 좇는 개인들의 성공 전략이 아니라 문명인의 문화적 열망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직업 교육이나 시민으로서의 삶을 위한 능력 함양은 대학이 아닌 별도의 학교에서 추구되어야 하는데, 이는 그러한 교육이 덜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대학에 맞지 않고 따라서 대학에서는 적절히 제공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대학과 더 낮은 등급의 학교(lower schools)나 전문인 양성학교 사이의 차이는 넓고도 단순하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라기보다는 종류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 전체 교육 시스템 속에서 대학보다는 중등교육기관 및 전문인 양성학교에 더 많은 그리고 더 무거운 책임이 부과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시민정신은 학문보다 더 광범위하고 중요한 범주이다. 그리고 문명화된 삶의 확장은 그 자체의 한가로운 목적 속에서 행해지는 지식 추구에 비해 한층 더 광범위하고 중요한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의 탐구를 수행해야 할 기관들에 그것과 무관한 외적인 의무를 부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시민정신이나 현실적 업무 능력의 함양과 같이 그 자체로 중대한 외재적 문제들까지 다루도록 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들은 너무도 중요한 의무들이기 때문에 학문의 전당에 의해 부차적 문제로 다루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학문의 전당에 있는 교수들이란 그들 자신의 고유한 일에 관해서는 적임자이겠지만, 세속적 지혜에 관한 한 전문가나 실무인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 학부대학과 전문대학원이 진짜 대학(베블런은 대학의 정의에 비추어 ‘대학원’이 진짜 대학이라고 생각한다)과 하나의 대학 법인 내에 속하게 됨으로써 목적, 업무, 정신과 관련해 본질적 불일치가 발생한다. 이는 양자가 본래적으로 추구해야 할 각각의 목표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한다. 지식의 추구 및 취업 준비라는 양쪽의 목표는 양립 가능한 두 축이 아니다. 양쪽 모두에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 학문의 추구는 심각한 방해를 받게 된다.
대학 그리고 전문인 양성학교 및 기술학교, 양쪽의 허영이 어느 정도는 손상되겠지만, 이들의 본질적 이익을 위해서는 이 둘 사이가 완전하게 분리될 필요가 있다. 오직 이러한 조건에서만 양자는 본연의 일을 제대로 능숙하게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교정 안에서는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과학과 학문?사실적 지식(matter-of-fact knowledge)의 추구?이외의 어떠한 목적이나 관심사도 훼방꾼으로 치부되어야 한다.
기업의 논리에 물든 대학 지배구조의 문제
이사회의 구성과 총장 선출 방식으로부터
미국의 대학 이사회는 (과거 성직자가 다수 포진하던 때와 비교해 현저히) 세속화되었다. 이때 세속화는 오늘날 사회의 지배적인 정서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사업가로의 대체가 대세를 이룬다.
사람들이 이러한 사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즐겨 내세우는 근거로는 대학 법인의 재정적 문제를 다룰 노련한 실무인의 필요성을 들 수 있다. … 이러한 추세는 많은 부분이, 학문의 전당에 대한 후견인으로서의 특별한 능력을 입증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부자들 특히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커다란 존경을 받는 세태와 무관하지 않다. 사업에서의 성공은 사업과 무관한 일에서조차 유능할 것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아무런 이의 없이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사업가가 대학 법인의 금전적 복지를 돌보는 것은 물론 대학의 설립 목적인 지적 활동에 대한 추구를 후원하고 통제하는 적임자로도 선호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들 기업인 이사들이 대학 정책의 세세한 사항들을 직접 관리, 감독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은 지출 예산을 통제한다. 그러나 대학의 학술 활동은 이사회의 예산 통제에 의해 지배된다. 대학의 교직원들이 예산에 의해 명시된 사항 이외의 일을 벌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습관적으로 그리고 기질적으로 유형의(tangible) 금전적 가치에 민감하고 그것을 높게 평가하게 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기민한 이사회라면 대학의 수입 중 보다 많은 부분을, 가령 부동산의 가치를 높이고 꾸미는 데 투입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사업가적인 검약에 익숙한 이사회는 또한 남은 수입 중 적지 않은 몫을 감채기금(sinking fund)으로 적립해 예상치 못한 우발적 상황에 막연히 대비하려 할 것이다. 반면 대학의 교직원들은 (소문날 정도로) 낮은 보수와 적은 인력을 감수함으로써 업무 역량을 심각하게 훼손당한다. 교직원들이 도서나 당기의 사용을 위한 실험실습 기자재의 구입을 요구할 경우, 이사회는 요구액의 일부 가령 10~15퍼센트 만을 마지못해 용인하는 인색한 해법을 내놓을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용도로 배정된 자금조차도 적지 않은 몫이, 현재의 지배적인 가격보다 더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을 미래의 어느 시점까지는, 사용되지 않은 채 적립되기만 할 것이다.
또한 이사회는 이와 같은 능률지상주의로 인해 경상지출 용도로 할당된 자금을, 사업가적 기질이 있는 학생들을 육성하거나 즉각적인 수익을 낳을 것으로 여겨지는, “실용적”이거나 또는 실용적에 가까운 교육 노선 및 학술적 선전 등에 우선적으로 배분한다.(기업에 필요한 인재를 제공하는 쪽에 대학의 관심과 노선이 집중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의 문제가 대학 총장의 경우에도 발견된다. 예산 명세서에 의해 제한되기 때문에 총장에게 허용된 재량의 여지는 일반적으로 광범위하지도 본질적이지도 않다. 실제로 그는 이사회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데, 이때 그 책임은 주로 예산의 금전적 명세를 준수할 것에 집중된다.
대학 수장이 일반적으로 이사회의 선택에 의해 임명된다는 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사회는 임명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구미에 맞는 대학 총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대학의 수장으로 선발되는 주요한 기준은 그 사람의 사업적 능력이다. 물론 이 표현은 다소 특수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될 사람이라면 그러한 능력이 마땅히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현재 널리 활발하게 확산되고 있다. … 신임 총장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예의상 그런 것이건 명문화된 규정에 의한 것이건, 동문회의 의견을 반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의 결과도 그렇지 않은 경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문제가 동문들의 몫인 한, 동문들 중 성공한 사업가들이 지배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오늘날의 대중적 정서를 고려한다면 당연한 결과이다.
영리기업의 시스템을 모방하는 학교 행정 체계와 정책
상품화될 수 있는 지식을 거래하는 사업장이 된 대학
사람들은 대학을 기업과 유사하게 재편하고 통제해야 할 커다란 필요성 위에서 대학의 장비·인력·일상 업무 등에 관해 상세히 거론하고 있다. 효율적 시스템에 대한 이러한 주장 속에는 이들 배움의 자치체가 잘 관리된 사업체의 패턴을 따라 조직적으로 업무를 배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이 입장에서 대학은 상품화될 수 있는 지식을 거래하는 사업장으로 간주되는데, 이를 지배하는 학문의 수장은 수중의 수단들을 실행 가능한 최대한의 산출을 통해 이익으로 전환할 것을 소임으로 삼는다. 대학은 막대한 자금을 가진 법인이다. 그리고 사업의 일상적인 훈련으로 편견을 지니게 된 사람들에게는 대학을 투자나 매출액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소매업계의 경쟁하는 기업들이 고객을 놓고 경쟁을 벌이듯, 대학들도 시장성 있는 교육 장사에 뛰어들어 경쟁을 벌인다. 이제 경쟁적 사업체를 이끄는 경영진들의 임무는 전략적 성격을 띤다. 총장은 자신의 지휘 아래 일하는 “종업원과 부하직원들”을 전적으로 통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그의 정책 방향에 속한 직원들의 즉각적이고도 확고한 충성에 의지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는 따라서 채용과 해고 그리고 보상과 징계를 그 수단으로 휘두른다. “교수들은 특정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특정의 계획된 판매 가능한 결과들을 산출해내도록 고용된 일군의 종업원들로 인식될 뿐이다.” 효율적인 정책 추진을 위해 총장은 필연적으로 전체 교수들 중에서 신뢰할 만한 자문단과 행동대원들을 주변에 모으게 된다. 이들 참모나 자문역들은 학교 내에서 높은 직위를 차지할 수 있고, 학자로서도 높은 지위를 점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그에 따른 높은 보수도 따른다.(각종 행정직을 맡은 이들 교수는 장래에 총장 후보를 지망할 때에도 우선적으로 고려될 확률이 높다.)
이렇게 구성된 학사 행정 체계 아래서 막대한 매출과 산출을 거둘 것으로 기대되는 것은, 역시 학부대학과 일군의 전문인 양성학교 즉 전문대학원이다. 이 구성 요소들은 보다 많은 학생의 등록, 수여되는 여러 학위의 숫자들, 대중 강좌 그리고 교과 과정 등등의 관점에서 통계적으로 압도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그 과정에서 대학의 학문을 진척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대학원 과정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더불어 운동 시설이나 학내 편의시설, 정기적인 전시회나 축제 등이 부가적으로 추가된다.
대학의 학문적 일상에 일어난 변화
사교와 취미, 유한계급에게 필수적인 교양 활동의 증가
기업적 경영으로의 이행을 기점으로, 규모 이외의 다른 차원에서도 모종의 주목할 만한 변화를 겪고 있다. 학부나 칼리지는 숫자의 증가와 함께 배움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 이외의 다른 기능들도 점점 더 많이 떠안게 되었다. 이 숫자의 증가는 동시에 늘어난 학생 집단의 학문적인 양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즉 대학을 다니는 이유를 빈말로라도 지식의 추구에서 찾지 않는 학생들의 비중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것이다. 명예로운 졸업을 인증하는 학사학위의 취득을 위해 마땅히 준수해야 할 의무 재학 기간으로 일부 평판 좋은 대학에서 운영 중인 “학부 과정”(college course)은 관습적인 교양의 힘에 의해 상류층의 필수품이 되었다. 전체 학생들 중 이 상류층 출신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으며, 대학의 이사진들 역시 이들의 등록이나 재학을 후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인식하게 됨에 따라, 대학의 조직 또한 전략적 필요에 의해 무엇보다도 이들 상류층 학생들의 요구에 최대한 부응하게 되었다.
유한계급 출신의 학생들은, 그리고 이들이 다수에 영향을 미치는 한에서 전체 학생들 또한, 학업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이 자발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이 다른 것들에 관심을 보이는 한, 대학은 반드시 이 관심사들을 잘 챙겨주어야 한다. 이를 지키지 못하면 그들의 애호와 호의를 잃게 되며, 결국 그 이탈과 함께 이 대학에 대한 상류사회의 평판도 악화되고 등록률 또한 심각하게 저하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의 수강과 연구 활동보다는 사교 클럽, 동호회, 전시회, “학생 활동”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범위에 걸친 학문 외적 교류가, 즉 우아하고 무해한 유흥의 수단과 방법이 대학의 일상에 점점 더 깊숙이 침투한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가 효과를 거두어 (상류층 출신이 다수 포함된) 등록생 수가 늘어난다면, 그에 따라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난다. “명예로운 만기 졸업을 위해 쌓아두어야 할 학점 취득 이외의 학문 연구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열의 없는 학생들을 위해 교과 과정이 수정되는 것이다. 많은 수의 학생들을 위한 대규모의 학업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이 생기고, 따라서 제공되는 교육은 표준화된 시간 단위, 학점, 학습 내용의 크기로 약분된다. 이러한 학사 관리 업무를 보다 용이하고 정확하게 수행할 목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주어진 교과목들을 한층 현란하게 보일 목적으로 과목들의 숫자는 늘리고 대신 무게와 용량은 줄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베블런은 선택과목 제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심도 있는 학업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것은 별볼일없는 수준의 형식적인 공부가 되고 만다. “학업 생활을 과제물을 치장하는 일 주변에서만 맴돌게 된다.”
교육뿐 아니라 연구 활동에까지 미치는 악영향
대학 학문의 불임화
형식적인 학업이나 기계적인 회계 업무는 학부에서 갈수록 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고 있는 곳은 대학원 부분이다.
대체로 특정 학과 구성원들에 의해 제공되는 강의들의 전공 분야 숫자가 해당 학과 구성원들의 숫자를 능가한다면, 일부 전공 분야나 강좌는 형식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으며 기껏해야 평범한 결과만을 낳게 마련이다. … 강사가 교과목 자체에 진지한 관심을 제대로 쏟는 게 당연한 전공 수업의 경우에도 그들의 시간과 에너지가 여러 강의들에 분산된다면 피상적인 관심 이상의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훌륭한 작업, 말하자면 연구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충분히 훌륭한 작업은 자유로운 재량권과 여유로운 시간 그리고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차별화된 전공 과목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면, 그리고 늘 그러하듯이 이들 과목이 교수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강의 시간으로 배정되고 따라서 무엇에도 확고하고도 지속적으로 집중할 수 없게 한다면, 제공되는 강의는 형식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강의의 질 또한 비전문적이고 현학적으로 악화되게 마련이다. 학과 구성원들의 전문적인 능력이 아니라 다루는 과목들의 범위를 최대한 확장하는 것만을 중시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결과가 예외적이라고 할 수 없다.
학생들만 형식적인 학문 추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영향이 교수 즉 연구자들에게까지 미친다. 과도하게 많은 교과목을 처리하기 위해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 분야에 투입할 시간과 에너지가 더 이상 남지 않을 정도로 피상적이 비전문적인 강의에 소모되고 있다. 거기에 각종 행정 업무까지 곁들여진다. 연구 활동은 저만치 뒤로 미루어지고 “대학의 불임화”가 초래되고 있는 것이다.
헛된 명성에의 추구 가운데 고사하는 학문
고객 유치를 위한 가시적 통계의 제시
이 모든 것은 결국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대학 간 경쟁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할 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한때 연구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도입되었던 장학금 제도마저 변질되고 있다. 명예로움 탁월함에 대해 부여되었던 상당 금액의 장학금은 이제 보다 많은 학생들을 위해 잘게 쪼개지고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장학금 제도를 내세워 학문 부흥에 적극적인 학교로서의 이미지를 관리한다.
또한 대학의 교수들 특히 총장은 대외적으로 학교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대중강좌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러한 대중강좌의 청중은 대개 근무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교양 강좌를 호사취미로 즐길 수 있는 상류층 인사들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고객들은 비단 등록생만이 아니다. 학교에 거액의 기부금을 희사할 수 있는 지역사회의 부유한 자들이 보다 중요한 고객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일련의 홍보 활동을 위해 동원되는 것은 가시적인 통계숫자들이다. 등록생 수, 취업률, 장학금 제도, 다양한 교과목의 수, 화려한 캠퍼스 건물 그리고 실제의 학문적 업적과는 무관한 명망가적인 교수의 숫자 등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정작 투자되어야 할 실험실과 교육 자재, 그리고 도서관은 황폐한 지경으로 방치되고 만다. 기자재가 없는 실험실, 책이 없는 도서관, 의미 없는 모금, 토건 국가를 모방한 대학 내의 건설 붐 등, 대학 내 곳곳으로 침투한 효율성의 논리, 자본의 논리에 의해 대학이, 학문이 위기에 처한 것이다.
21세기 한국 대학의 위기
베블런의 대학 비판에서 무엇을 참조할 수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언론이 대학을 평가하고 있다. 평가 기준은 논문 인용 지수, 평판, 재정 상황 등이다. 언론사 대학 평가가 수험생, 학부모, 기부자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대학도 언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베블런이 지적했듯, 대학이 학교 홍보에 목을 매고 있다.
대학 총장의 선출 과정을 보자. 이미 전국 40개 국립대학이 총장 직선제를 포기한 상황이다. 대학의 학문적 자율성은 재정 지원을 빌미로 한 정부의 통제 아래 속수무책으로 놓이게 되었다. 비록 베블런 당대의 미국 대학과는 달리 기업인 중심 이사회가 대세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소수의 위원들로 구성된 선출위원회가 총장을 간선으로 뽑는 상황에서, “로또 총장”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게다가 그렇게 선출된 총장들은 재정 확충 방안과 캠퍼스 개발 계획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베블런이 말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면모를 보인다. 그 주체가 기업인 이사회이건 정부이건 간에 학문 본연의 가치를 폄하하고 허울 좋은 “경쟁력”이라는 이름 아래 예산을 손에 쥔 채 대학의 목을 죄고 있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렇다고 기업 논리에 따른 대학의 영리사업체화가 베블런 당대에 비해 덜 진척되었다고 보기에도 어려운 것이, 최근 몇몇 대기업이 대학을 인수하면서 추진하는 여러 정책들이 학생과 교수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또한 사학 재단의 비리는 이미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각 대학의 캠퍼스에 우후죽순처럼 솟고 있는 거창한 건물들만 보아도 대학의 효율적인 경영이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것이 향하는 곳은 진정한 대학인이라 할 “연구자”(교수 그리고 학문에 뜻을 둔 학생들)을 위한 기관이 아니다. 경영대학원은 오래전부터 학내에서 가장 인기 좋은 부문이 되었고, 이제는 법학대학원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학부대학도 마찬가지여서, 취업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학과들은 폐과라는 칼을 맞고 있다. “대학”이라는 이름이 “취업학원”이나 다를 바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대학 졸업장이 취업을 보장해주지도 못하는 게 현실이다. 혹여 학문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있다 해도 살인적인 등록금을 해결하느라 생계를 위협을 느끼고 있는 형편이다. 결국 경제적으로 어려운 계급의 학생들은 학문의 장에 진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비용 절감을 위한 일관적인 정책은 시간강사의 과도한 활용으로 이어져 연구자들의 (정신적.물리적) 죽음을 방조/강요하고 있다.
베블런이 이 책 『미국의 고등교육』에서 제시하는 해법이 있기는 하다. 대학을 대학원으로 축소하고 이사회와 총장직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대학원을 통한 전문인력 양성은 별도의 전문 교육기관으로 넘기고, 시민적 덕성의 고취를 위한 학부의 교양교육은 중등교육기관의 몫으로 넘겨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이 진정한 학문의 전당이 되기 위해서는 학자의 자치체가 되어야 하며 그러려면 대학원 이외의 장식물들을 다 포기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베블런 자신도 인정하고 있듯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해법이다.(그러나 베블런은 존 듀이 등 동시대의 진보적인 학자들과 함께 대안대학인 뉴욕 “사회과학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현재의 뉴스쿨 대학)을 세우는 등 실제로 현실적 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블런의 (유보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그가 비판하고 있는 대학 사회 도처의 문제들이다. 그의 지적은, 사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던 당연한 데에까지 미친다. 문제는 베블런만큼이나 철저히 속속들이 “대학의 본질”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러한 반성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곳곳에서 대학의 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드높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 진정으로 담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이며, 그를 위해 어떠한 것들이 문제점으로 사고되어야 할지를 총체적으로 고민할 때, 1918년 미국의 대학을 비판한 베블런의 글이 하나의 중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베블런의 이 책은 현재의 미국 대학보다는 현재의 한국 대학과 교육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20세기 초의 미국 대학을 다룬 이 글은 당시의 상황에서부터 학교 당국자들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마치 현재의 한국 대학을 설명한 듯 낯설지 않다. 서로 다른 시대의 서로 다른 사회문화에 대한 설명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성이 많다. 시대를 뛰어넘는 이런 유사성이 당시 미국의 기업과 현재 한국의 재벌기업 사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는 점 역시 덧붙일 필요가 있다.―홍훈, 「옮긴이 해제」 중에서
목차
소개하는 글 ㆍ 9
서문 ㆍ 17
1 서론: 근대 생활에서 대학이 차지하는 위상 ㆍ 25
2 대학의 이사회 ㆍ 81
3 학사 행정과 정책 ㆍ 105
4 학문적인 명성과 물적 장비 ㆍ 153
5 대학의 교수들 ㆍ 165
6 과학자들의 몫 ㆍ 187
7 직업 교육 ㆍ 209
8 요약과 시산표의 결산 ㆍ 237
옮긴이 해제 ㆍ 297
옮긴이의 말 ㆍ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