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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특권: 명문 사립 고등학교의 새로운 엘리트 만들기

발행사항
서울: 후마니타스, 2019
형태사항
420 p.: 삽도, 23cm
소장정보
위치등록번호청구기호 / 출력상태반납예정일
이용 가능 (1)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00029201대출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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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번호
    00029201
    상태/반납예정일
    대출가능
    -
    위치/청구기호(출력)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책 소개
* 미국 사회문제연구소가 매년 가장 뛰어난 사회과학연구에 수여하는 C.라이트밀스상 수상
* 부르디외의 엘리트 문화연구 『재생산』, 『상속자들』, 『국가귀족』에 이은 신엘리트 연구의 역작
* 기회는 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공정사회”에서도 왜 엘리트들은 그대로인가?

* 나는 이 책이 한국 사회 엘리트들의 구조 변동과 한국 엘리트들의 무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영감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엄기호(사회학자)

* 주제는 도발적이고 관찰은 대범하다. 분석은 치밀하고 서술은 입체적이다. 세상이 아무리 평등해져도, 늘 잘난 사람들만 엘리트가 되는 과정을 저자는 ‘불여일견’의 자세로 추적한다. 21세기 명문고 학생들은 과거의 귀족적 특권 의식을 공정하지 않다면서 강하게 거부하고 대중문화도 편안하게 즐긴다. 그러면서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특권은 노력에 따른 정의로운 결과라는 ‘민주주의적 불평등’의 판을 깐다. 아름다운 포장지를 벗겨 썩은 과일을 드러내는 사회학의 진수를 느껴 보고 싶은 분들에게 권한다./오찬호(사회학자)

* 이제 새로운 엘리트들은 봉건적이고 폐쇄적이지 않으며?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코스모폴리탄하다. 이 책은 미국의 상류층 가문들이 ‘아이비 캐슬’이라는 문화 권력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계급과 지위를 재생산하는지 현미경처럼 자세히 들여다본다. 과연 우리의 스카이 캐슬은 아이비 캐슬과 얼마나 다른가./김종영(『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대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저자, 경희대 교수)

* 단연 돋보이는 저작. 엘리트 사회를 이루는 충격적인 현재의 경향을 대가다운 솜씨로 그려 내고 있다.__리처드 세넷(『장인』,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저자)

* 부모로부터 대물림된 특권은 어떻게 개인의 능력이 되었나
* 최고 엘리트들의 심장부, 사립 기숙학교로 들어간 컬럼비아대 사회학자의 참여관찰기


미국의 뉴햄프셔 주, 콩코드에 위치한 명문 사립고 세인트폴 스쿨은 오랫동안 부유층 자제들만이 다니는 배타적 영역이었다. 500명 남짓의 아이들이 2000에이커에 달하는 부지에 늘어선 15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100개 이상의 고딕 양식 건물들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는다. 이 학교의 연간 학비는 4만 달러, 학생 1인당 책정된 학교 예산은 8만 달러, 한 학생당 기부금은 100만 달러에 달한다. 가난한 파키스탄 이민자였지만 외과의사로 성공한 아버지 덕에 이 사립학교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던 저자는, 그러나 그 시간이 “행복하지만은 않았다”고 고백한다. 졸업 당시 동문회장에 뽑힐 정도로 학교생활에는 잘 적응했지만, 실은 “엘리트 친구들 사이에서” 그는 내내 “불편”했다. 이런 “특권층들만의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 그는 졸업 후 아이비리그로 직행한 동기들과 달리 작은 리버럴아츠 칼리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험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의문을 남긴다.
“왜 누구는 이런 학교에 들어오는 게 당연한데, 누구는 죽도록 노력해 성취해야 하는 일이 되는가? 왜 어떤 애들은 학교생활이 너무 편하고 쉬운데, 어떤 애들에겐 악전고투해야 하는 일이 될까? 왜 이런 엘리트 학교의 대다수는 여전히 부잣집 애들인가? 이들은 어떻게 기존의 특권을 그대로 수호하면서도 타고난 재능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 자리까지 오른 ‘능력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걸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그는 졸업 후 9년 만에, 이번엔 선생이자 연구자로서, 모교로 돌아간다.

* 민주화 이후 엘리트의 진화 : 능력주의 신엘리트의 등장
1993년, 올리브색 피부의 열네 살 소년 칸은 처음 도착한 세인트폴 스쿨 기숙사에서 뜻밖의 광경을 마주한다. 예상과 달리 기숙사가 온통 흑인과 라틴계 애들뿐이었던 것. 하지만 이는 그 기숙사가 유색인 학생들만을 따로 모아놓은 ‘소수학생 기숙사’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나머지 기숙사들은 온통 백인 명문가 자제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는 학교 측의 인종차별적 조치 때문이 아니었다. 학교는 이 기숙사를 없애고 그들을 다른 백인 학생들과 함께 거주하도록 할 작정이었으나 이를 반대한 것은 오히려 유색인 학생들이었다. 유색인 학생들은 그곳의 백인 엘리트 학우들 사이에서 “불편”했고, 고향 동네에서처럼 자기네들끼리 있는 게 속편했던 것이다.
그리고 졸업 후 9년 만인 2004년, 교사로서 엘리트 연구를 위해 모교에 돌아간 칸은 충격적인 변화를 목격한다. 여전히 백인 명문가 부유층이 지배적일 거라는 그의 예상을 깨고, 오히려 그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고립된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세인트폴의 인종적·계급적 다양성은 더욱 증가했고(“빈자와 부자, 흑인과 백인, 여자애들과 남자애들이 교실과 운동장, 댄스파티와 기숙사, 그리고 침대에서 청소년기를 공유”), “이미 성공의 열쇠를 쥔 양 행동하는” 특권층 아이들은 “세인트폴의 치부”로 여겨지며 “멸종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학생들은 이런 학생들의 입학 경위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들이 여기서 살아남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이들은 기존의 엘리트에 대한 고정관념과 달랐다. 이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지식과 문화, 인맥 주변에 장벽을 두르고 고급문화, 고급 취향을 구분지으며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폐쇄적인 엘리트들이 아니었다. 전세 비행기를 타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보고 와서는 랩음악을 즐기며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개방성과 문화적 잡종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디 내놔도 평범한 미국 시민 같은 외양에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기사식당에서 똑같이 편안히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엘리트들이었던 것.
저자는 이와 같은 세인트폴 신엘리트들의 경제적 기원을 과거 이주민이 유입되면서 일어난 부의 지각변동에서 찾는다. 과거 자본수입이 압도적이었던 부자들과 달리 이제는 임금 소득이 압도적이 되면서 “자신들의 위치를, 그들이 가진 자본이나 물려받은 위치가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로 설명”하는 부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이들과 우리의 차이는 공장을 소유하느냐 그 공장에서 일하느냐의 차이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아침에 일어나 월급받기 위해 출근”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우리와 같다고 생각한다.
과연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한” 민주사회에서 “결과도 정의로운” 사회에 도달한 것일까?


* 불평등의 심화

35쪽: “여전히 세인트폴은 이미 엘리트인 이들을 위한 곳이다. 학부모들이 학교를 방문하는 날이면 벤츠나 BMW가 바다를 이루고, 기사를 동반한 롤스로이스도 간간이 보인다. 햇볕이 쨍한 날이면 캠퍼스는 이들이 목과 손목, 손가락에 무심코 걸친 잘 세공된 보석류로 반짝거린다.”

우리는 보통 개방성이 평등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고의 엘리트 기관들에서 흑인과 여성은 모두 눈에 띄게 증가했다. 우리는 이것을 ‘평등’의 지표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상위층의 소득 증가를 분석해 보면 오히려 불평등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가고 있다. 지난 40년간 미국의 평균 가계소득은 25퍼센트 증가했지만, 상위 5퍼센트의 가계소득은 68퍼센트 증가했으며, 상위 1퍼센트는 323퍼센트, 최상위 0.1퍼센트는 492퍼센트 증가했다. 게다가 그 어느 때보다 소외계층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는 하버드 대학에서 ‘중간 소득’ 구간에 위치한 학생들은 미국 사회 전체로 놓고 보면 상위 5퍼센트 소득 수준에 해당한다. 이렇게 (인종적·문화적) 개방성은 증가한 듯하지만 실은 계급적으로 더 불평등해진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엘리트 기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소외계층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왜 그 어느 때보다 부와 권력의 세습은 심해진 것처럼 보이는가? 그런데도 이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이런 세습을 능력주의로 포장하고 있는가?
저자는 바로 그 해답을 이들의 학교생활에서 찾는다.


* “세상은 위계적이다. 하지만 그 위계는 우리 엘리트들이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다.”

144쪽: “노력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무한한 가능성이 지닌 가치에 대해 세인트폴 학생들이 피력하는 믿음은 몹시 놀랍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깜찍하며 상당히 순진무구하다. 그런 믿음은 꽤나 편리한 것이기도 한데, 이에 따르면 위계는 분명 자연적 불평등을 반영하지만 그것이 항구적인 불평등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은 위계를 넘나드는 법을 배움으로써 개인이 사다리에서 자신보다 위/아래 있는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위계는 보이지 않게 되고, 그 사다리 위에서 성취하는 것들이 온전한 자기 노력의 결과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학생들이 세인트폴에서 가장 처음 배우는 것은, 바로 위계의 존재다. 세인트폴에 들어와 제일 처음 치르는 입회식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학교 교직원과의 관계, 각별한 사제관계, 선후배 관계에 이르기까지 세인트폴의 일상사는 온통 위계를 몸에 익히는 과정들이다. 아이들은 이 세상이 이와 같은 위계질서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자연스럽게 익혀 나간다. 예배당에서 (몇십 년간 학교 건물을 청소해 온 교직원에게는 배정되지 않는) 자기만의 지정석을 갖게 되는 첫 경험에서부터 이들은 “세상은 위계적인 곳이며, 이런 위계 안에서 사람은 제각기 다른 위치를 차지한다”는 질서를 각인하며,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한 줄씩 위치가 상승하는 것을 통해 위계가 자신들을 제약하는 천장이 아니라 오를 수 있는 사다리라는 걸 배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상승의 원리를 (학년이 올라가는 건 교과과정상 당연한 변화인데도) 자신이 노력한 결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학생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또 학생들은 선생과의 복잡다단한 밀도 높은 관계를 통해서도 위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법을 배운다. 선생들과 24시간 붙어 지내면서 세인트폴 학생들은 다른 일반고의 사제관계를 넘어선 매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이를 통해 그들은 위계에서 자신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사람들과 어떨 때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또 어떨 때는 그 선을 살짝 넘나들면서 막역하게 지내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교사와의 관계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교사들의 ‘헌신’에 대한 학생들의 감사하는 마음 속에 숨겨진 엘리트적 태도이다. 교사들이 하루 종일 캠퍼스에 살면서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며 항상 그들을 위해 ‘대기 중’인 모습은 엘리트들에게 자기 삶의 중요성과 자신들의 가치를 주입시키는 데 일조한다. 졸업생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칸은 세인트폴 출신들이 교사의 헌신에 대해 특히나 감상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는데 뛰어난 교사들이 자기 삶을 완전히 바쳐 학생들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의 기저에는 사실 “자존감”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청소나 식당일을 하는 교직원들과의 관계와 비교된다. 교직원들은 사실 학교에서 가장 명백하게 ‘불평등’을 드러내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같은 공간, 동시대를 살지만 완전히 분리된 세계에 존재하는 것 같다. 엘리트들이 이런 명백한 불평등을 상기시켜 주는 가시적 증거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시’이다. 학생들에게 직원들에 대해 물었을 때 그들에게 매일같이 음식을 내다 주고 그들이 먹고 자는 곳을 청소해 주는 그들의 이름을 (그들이 달고 있는 명찰에도 불구하고) 실제 댈 수 있는 학생은 없었다(이는 선생과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특히 대조적이다.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은 학생들의 초미의 관심사다). 저자는 이들의 삶이 드러내는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생각을 학생들에게 물어보았으나 학생들은 대부분 교직원들이 마주한 삶의 난관을 구조적 불평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개인적으로 맞닥뜨린 불운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교직원들 가운데 예외적인 인물이 둘 있다. 바로 식당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 빅 가이와 우유 난쟁이. 저자는 유독 이 둘과만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점에 주목한다. 그들의 장애가 그들이 출세하지 못하는 데 대한 명백한 설명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은’ 존재로 여길 수 있었던 것. 또 예상과 달리 직원들에게 더 친절하고 잘 지내는 아이들은 중간계급이 아니라 부잣집 아이들이라는 점도 발견한다. 부잣집 아이들은 자신의 위치가 확고하므로 직원과 더 편하게 안정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 반면, 중간계급 및 노동자계급 학생들에겐 직원의 존재가 자신의 출신 배경을 떠오르게 하는 ‘불편한’ 존재였기 때문.
학생들은 학교 안의 이런 다양한 관계들을 경험하며 위계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고 관계를 넘나드는 방법을 체화한다. 세인트폴의 가치는 공부가 아니라 바로 이런 관계를 경험하며 “거기 있는” 데 있다.



* 특권의 편안함

189-190쪽 : 그들이 대부분의 미국 십대들과 다른 점은 분명 무수히 많을 것이다. 사는 집에서부터 겨울 방학 동안 스키 타러 가는 곳, 또 여름방학 때 고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인턴십 기회들까지 말이다. 그러나 이런 부유한 삶의 치장들 가운데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랑스레 떠벌리는 일은 없었다. .... 학생들은 엘리트 지식에 가치를 두는 것도, 자신들과 다른 사람을 구분해 주는 것들을 즐기는 것도(또는 그 뒤에 숨는 것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배운다. 대신에 그들은 문화적 경계들을 가로지르며 더없이 자유롭게 소비하는 법을 배운다. 그 모든 것을 흡수하도록 그리고 모든 것을 흡수하기를 원하도록 배우는 것이다. 그레이스는 나와 디엠엑스와 바이올린 기교 모두에 대해 대화를 나누도록 배운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부와 특정한 지식을 이용해서 경계를 형성하는 대신, 운동장은 평평하다는 걸 시사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몸에 걸친 셔츠의 질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셔츠 안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저자가 발견한 새로운 엘리트들의 모습은 “집안의 재력만 믿고 쉽게 사는 특권 의식에 젖은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위계를 보존하되 그것을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드는 특권의 기술, 즉 ‘편안함’을 체화한 모양새로,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미국 시민과 전혀 다를 것 없어 보인다.
학교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학생들을 분류해 본다면, 건방짐과 경외심을 양 극단으로 한 스펙트럼을 그려 볼 수 있다. 이 학교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있는 애들은 바로 이런 양 극단의 중간쯤에 위치한 아이들이다. 세인트폴에 대한 경외심을 가진 애들은 유색인종과 노동계급 아이들이다. 이들에게 세인트폴은 자신이 이전까지는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회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흑인학생들이 수업은 가장 많이 들으면서 성적은 가장 낮은 이유를 의아해 하며 이를 11학년 흑인학생 데빈에게 묻는다. 그러자 그녀는 그것이 자신에겐 “두 번 다시 못 올 기회를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답한다. “세인트폴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어” 가기 위한 전략이었던 것. 하지만 저자는 이런 경외심이 “위계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게 행동해야 하는” 그들의 역량을 저해한다는 것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이런 애들은 너무 공손한 나머지 세인트폴에서 성공하는 데 중요한 교사들과의 친밀감 쌓기나 복잡다단한 관계 형성을 잘하지 못한다. 이는 편하게 엘리트 세계를 헤쳐나갈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한다.
학업 부담에 대한 압박감에 치여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메리 피셔도 그런 편안함을 체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사례다. 저자는 그녀가 아이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이유가 결국 “노력하면 앞설 수 있다”는 믿음보다 더 후진 입장, 즉 “노력하는 것만이 앞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입장을 체화하고 있기 때문임을 발견한다. 자신들의 성취가 거의 “수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특권을 체화한 성공한 세인트폴 학생들과는 달랐던 것.
일주일에 두 번 있는 공식만찬 자리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이런 자리에서 학생들이 식사 예절이나 샐러드 포크를 구분하는 법 같은 걸 익힌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 현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전교생이 해리포터의 무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웅장하고 아름다운 식당에 모여 한껏 차려입고 격식을 갖춘 만찬을 하는 경험을 이렇게 일상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세인트폴 같은 기관만이 제공해 줄 수 있는 특권적 경험이다. 여기서 학생들은 이런 자리에서 편안하게 정장을 소화하는 법에서부터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둘러 앉아 대화를 나누는 법, 선생님과 식사하면서도 불안해하지 않는 법을 일상적으로 자연스레 익혀 나간다. 저자에 따르면 엘리트적 문화나 취향은 어떤 규칙들을 달달 외워서 실천하는 과정이 아니며, 그런 자리를 마주했을 때도 편안해하고 무심해질 수 있는 법, 그런 행사가 별게 아니라는 걸 배우면서 엘리트가 되어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엘리트적 태도의 핵심인 ‘편안함’은 게임의 규칙에 익숙해져야만 나올 수 있는 쿨한 태도, 일상적 ‘관계들’을 통해 오랜 기간 반복적으로 쌓아야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으로 (단순한 고급 지식보다) 훨씬 더 습득하기 어려운 자원이다. 세인트폴과 같은 특정 환경에서 쌓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몸에 배게 함으로써만 익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인트폴 같은 곳에서 받는 교육의 힘은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점차 쌓여 가면서 나오는 것으로 가르침이 반복될 때마다 점점 그들의 몸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그들 자신과 혼연일체가 됨으로써 마치 그 자체가 그들의 타고난 특성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 있다. 더구나 외관상 평범함을 체화한 신엘리트들은 자신들의 특권과 부를 자연스러워 보이게 만들며 비엘리트들에게 “이건 내 능력 때문이지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이 아니야. 너희들의 실패는 너희가 이런 사회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라는 서사를 튼튼히 구축할 수 있게 된다.


* 여학생과 흑인 학생들의 특권 익히기의 난점들 : 게임의 규칙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저자는 또한 계급과 인종, 젠더라는 카테고리가 이런 엘리트 문화의 습득에 어떤 식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해서도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이런 편안함의 습득은 계급과 인종, 젠더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가장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바로 노동계급 남자애들과 흑인 여자애들의 태도다. 노동계급 백인 남자애들은 세인트폴이 가르치는 가치를 가장 철저히 신봉하고 흡수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흑인 졸업반 여학생 칼라는 반대다. 공부잘하는 모범생 칼라는 겉으로는 학교에서 성공적인 학생으로 보이지만 실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개소리”로 치부하며 학교가 원하는 방식에 자신이 잠시 맞춰주고 있을 뿐이라는 식의 태도를 가진 아이다. 결국 그녀의 성공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고, 이는 선생과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거리감을 만들어 낸다. 칼라는 완벽히 적응하는 데는 실패한 것. 이유는 이 특권적 집단의 능력주의 프레임이 칼라에게는 너무나 뻔히 보이는 불평등을 은폐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런 학교에 오지 못한 고향 친구들을 생각하며 “왜 여기 애들은 저렇게 부자인 걸까? 왜 나처럼 생긴 애들은 이렇게 적은 거지”하는 모순에 직면한다. 그녀는 스스로 잘났기 때문에 여기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백인 상류층 애들 가운데 저자에게 이런 다른 고향 친구들 얘기를 꺼낸 아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아예 칼라와 같은 모순 자체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 이는 특권의 편안함을 체화하기가 칼라의 경우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가 된다.
젠더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특권을 체화하는 데 방해 요소가 된다. 공식만찬 자리에서의 어깨 노출 금지 규정이나 여학생 기숙사 신고식에서 벌어진 섹슈얼리티 위계를 몸에 새기는 게임(폭력)들(목구멍에 바나나 깊숙이 넣기 게임이나 성적 편력을 고백하는 게임 등)은 여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어떤 식으로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여학생들은 특권을 편안하게 소화해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동시에 섹슈얼리티 위계에서 자기 자리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데, 이 둘은 서로 배치되는 일이다. 남학생들과 달리 노출 있는 옷을 편안하게 소화하면서도 그것이 동시에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가져야 하고, “자연스러운” 남학생들의 성욕을 관리해 줘야 하며, 자신들의 섹슈얼리티를 남자애들에게 선물로 증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들은 특권의 편안함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으로 여학생들을 이중구속의 상황에 가둔다. 비만인 여학생이 거의 없고 섭식장애가 만연한 현실, 여학생들에게 몇 배나 높은 우울증,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로 학교를 떠나야 했던 이들도 거의가 여학생이었다는 현실은 이런 여학생들이 감당해야 하는 모순의 무게를 극명히 드러낸다.


* 대학 입시, 다른 학교들의 “분노를 자아낼 만큼의 합격률”의 비밀
저자의 이런 일상사에 대한 분석은 드디어 마지막 5장에서 ‘공부’ 이야기에 도달한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이 장에서 그는 그토록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아이들의 실제 능력이 어느 만큼인지, 정말 그토록 노력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높은 아이비리그 합격률을 보이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세인트폴의 커리큘럼은 “오만함”이 느껴질 정도의 방대함을 특징으로 한다. 영어, 역사, 사회 등과 같은 분과학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를 모두 통합한 ‘인문학’ 코스를 이수하는데, 이 커리큘럼 소개를 보면 그 누구도 가르칠 수 없고 그 누구도 배울 수 없을 만한 “얼토당토”하다. 학교가 이를 통해 애들에게 심어주는 건 그들이 “그런 걸 해낼 재목”이라는 느낌과 “삶에는 무한한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감각이다. 이런 수업에서 그들이 배우는 건 어떤 지식이 아니다. (일반학교 애들이 지식을 달달 외우며 각종 모의고사에 시달리는 동안) 그들은 이런저런 분야를 넘나들며 “큰 질문”을 던지고 이것저것 짜깁기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운다. 여기엔 틀린 답도 없다. 저자는 그 결과가 “기껏해야 뒤죽박죽”으로 “마치 아마추어 애호가를 양성하는 교육”과 다름없음을 신랄하게 폭로한다. 그들은 “언저리를 돌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영리하지만 공허한” 방식, “아는 것처럼 보이게 말하는 방식”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어쨌건 아이들은 이 방대한 커리큘럼을 어떻게 소화해 내는 것일까? 저자는 학생들이 대부분 인터넷 요약본을 가지고 편법적인 방법으로 과제를 해내고 있으며, 오히려 책을 다 읽는 학생은 바보 취급 당하고 성적을 낼 수 없는 구조라는 것도 발견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토록 높은(“다른 학교들의 분노를 자아낼 만큼의”) 아이비리그 합격률을 유지하는 비결은 무엇일까? 저자는 엄청난 재원을 통해 세인트폴이 거의 모든 학생들을 어느 분야에서든 탑으로 만들 수 있는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단 500명의 학생들에게 주어진 수백 개의 동아리들과 수많은 교과목들은 거의 무수한 선택지를 제공하며, 모든 학생이 어느 한 곳에서는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조직되어 있는 것. 성적도 평점이 아닌 범주로 매겨지기 때문에 수치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이비리그 대학들과의 오랜 연줄. 학교 입시 담당자들은 입학시즌이면 “열심히 전화를 돌리”는데, 위와 같은 평가체계를 통해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만들어 낸 뒤 각 대학의 구미에 맞는 애들을 짝짓기 하는 것이 그들의 비결이다.


* 공정 사회의 역설
엘리트들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하는 방식은 나머지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칸이 간파한 신엘리트적 태도의 핵심, 편안함은 모호할 뿐만 아니라 신흥 계급들이 숙달하기 어려운 것이다. 신흥 계급은 편안함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할 텐데 이런 노력이 표식을 남기지 않기란 불가능하기 때문. 결국 이런 편안함은 개방성을 표방하는 사회 안에서도 다른 계급의 출세를 제한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위치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칸에 따르면, 엘리트가 된다는 건, 단지 행위자가 내부에 뭔가(재능, 기술, 인적 자본)를 갖추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체화된 수행적 행위로, 행위자가 뭔가를 갖춰야 할 뿐만 아니라 엘리트 조직 안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것이 몸 자체에 각인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신체적 취향과 기질, 성향은 단순히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비싼”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것을 통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자연스러운 우리 자신의 모습처럼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학교는 어떤 엘리트들을 어떻게 키워 내고 있을까? 이 책의 해제에서 사회학자 엄기호는 미국 엘리트들의 구조 변동을 다룬 이 책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왜 ‘공정’이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공정’은 구엘리트들의 특권의식을 문제 삼는 신엘리트들의 무기이다.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통해 성취한 것만이 정당하다는 것이 공정 담론이다. 문제는 ‘공정’이 결과에 따른 차별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능력주의와 결합한 한국에서의 공정 담론은 결과의 지나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시험을 통과하면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특권이 생산되며 계속해서 불평등이 재생산되는 상황에서도 이 세상이 공정한 세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주의가 만들어 내는 불평등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남는다. 20세기 불평등에 맞선 투쟁들은 대개 접근 기회를 놓고 벌어진 투쟁들이었다. 여성과 흑인 등이 최고 기관들과 최고 위치에 통합될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투쟁들이었던 것. 그리고 이는 대부분 승리했다. 하지만 그것은 더 많은 기회뿐만 아니라 더 많은 평등에 대한 약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있어서는 허구로 드러났다. 이제는 이 역설을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가 우리 사회의 다음 질문이 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디어 소개]
☞ 경향신문 2019년 11월 15일자 기사 바로가기
목차
서론 | 민주적 불평등 13 1 새로운 엘리트들 43 2 자기 자리 찾기 83 3 특권의 편안함 147 4 젠더와 특권의 수행 213 5 베오울프도 배우고 〈죠스〉도 배우고 279 결론 351 방법론적 ·이론적 성찰들 364 감사의 말 372 해제 | 엘리트들의 ‘공정’ 사회 | 엄기호 377 옮긴이 후기 390 미주 396 참고문헌 408 찾아보기 414